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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장 Aug 05. 2017

10. 기억할 만한 지나침

#이시가키섬_ 730 교차로

오키나와의 이시가키섬에 닿으면 730 교차로를 한 번은 지나게 된다. 시내에서 차량 통행이 가장 많은 곳이라 애써 피하고 싶어도 그리 된다. 그렇다고 러시아워의 종로처럼 가다 서다를 되풀이할 일은 없다. 오키나와 본섬의 나하시 정도는 되어야 교통 체증이란 걸 실감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시사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기념비와 마주한다. 감자 모양의 거무스름한 돌에 군부대 마크를 닮은 삼각형 로고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730이란 숫자가 보인다.



파란 페인트칠이 된 730이란 숫자는 날짜를 가리킨다. 7월 30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30년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꺾고 FIFA 월드컵대회 첫 우승

1947년 아놀드 슈왈제네거 출생

1953년 역도산, 일본 프로레슬링협회 결성

1960년 경복궁을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

1977년 백건우, 윤정희 부부 유고슬로비아 피랍 중 탈출


이런 일들이 7월 30일에 일어났다. 다시 봐도 오키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바위에 새긴 730이란 숫자는 1978년 7월 30일을 가리킨다. 그날 오전 6시를 기해 오키나와의 차량 통행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었다. 정삼각형의 로고에 든 화살표는 그 방향의 전환을 상징한다.


시간을 좀더 과거로 돌려보자.

이시가키가 속한 이곳 야에야마 제도는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터진 오키나와 전투를 거쳐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석 달 가까이 치른 참혹한 전투로 양측 군인뿐 아니라 12만 명에 이르는 오키나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 넷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은 셈이다.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자마자 1945년 6월 24일 부로 일본식 좌측통행을 우측통행으로 바꿨다.

차들은 오른쪽 길로 다녔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오키나와는 우측통행을 고수했다. 오키나와가 괌이나 사이판처럼 미국의 자치령으로 남았더라면, 지금도 차들은 오른쪽으로 다닐 것이다.


1972년 5월 15일, 미국은 미일 신안보 조약에 따른 합의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했다. 그전만 해도 일본에서 오키나와로 들어가려면 여권을 챙겨야 했다. 전화를 하거나 소포를 보낼 때면 국제요금이 붙었고, 현지 통화도 엔이 아닌 달러였다.


일본 본토처럼 좌측통행을 시행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의 일이다. 핸들이 오른쪽에 달린 차들이 그 해에 잔뜩 들어왔다. 1978년식 버스를 ‘730차’로 불렀다. 그렇게 일본에 한 걸음 다가섰다.




오른손잡이에게 누가 “오늘부터 왼손을 쓰세요”라고 강제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능숙하게 이를 닦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차를 모는 일도 마찬가지다.

좌측통행은 낯설다. 일본에서 운전을 해보면 안다. 핸들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달려 있다. 기어, 방향 표시등, 와이퍼를 조작하는 레버의 위치도 반대쪽이다. 급한 마음에 방향 지시등 대신 와이퍼를 켜기도 하고, 무심코 우측 차선에 올라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


1978년 7월 30일은 일요일이었다. 출근이나 등교로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주말을 디데이로 잡았다. 오전 6시를 기해 소방서 사이렌이 울리고, 항구에서는 뱃고동이 울렸다. 차량이 붐비는 교차로마다 교통순경이 서서 호루라기를 불며 수신호를 했다.

철저한 준비로 큰 사고 없이 방향의 전환을 이뤄냈고, 교차로에 기념비를 세워야 할 만큼 기념할 만한 하루가 됐다.



문득 궁금해진다. 세계전도를 펴놓고, 좌측통행을 하는 나라와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를 다른 색연필로 칠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위키피디아는 답을 알고 있다. 통계 자료보니 우측통행이 좌측통행보다 확실히 많다. 비율은 7대 3 정도.


좌측통행을 하는 나라들 중에는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곳이 많다. 호주, 뉴질랜드, 홍콩,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뭐, 이런 나라들이다.


영국이 좌측통행을 한 데는 말의 영향이 컸다. 기수들은 보통 왼 등자를 밟아 말 등에 오른다. 칼을 뽑아들고 싸움을 할 때도 왼쪽에 서는 편이 유리하다. 아무래도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다.

마차를 모는 마부들도 왼쪽을 선호했다.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채찍에 행인이 맞아서 다칠 확률이 확실히 적기 때문이.


메이지유신 초기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해서 석 달을 머물렀다. 이들은 유럽의 작은 섬나라에서 제국의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영국을 모델로 교통 법규를 만들면서 좌측통행을 기준으로 삼았다.


빨간색은 우측통행, 파란색은 좌측통행 국가를 가리킨다. ⓒ 위키피디아


그에 반해 프랑스나 미국은 우측통행을 한다. 영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경쟁한 프랑스의 식민지들도 우측통행을 따랐다.

알제리, 카메룬,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뭐, 이런 나라들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협을 잇는 해저터널이 있다. 바다 밑 지반을 50킬로미터나 뚫어 만든 유로터널[Eurotunnel]은 영국 남부의 포트스턴과 프랑스 북부의 칼레를 잇는다.

다시피 영국과 프랑스는 차량 통행로가 반대다. 영국에서 출발하는 차는 왼쪽 차선을 타고,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차는 오른쪽 차선을 탄다. 이론적으로 두 대의 차량이 남북에서 같은 속도로 출발하면 터널 한가운데에서 충돌하게 된다.


두 나라는 이 난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했다. 도로를 달리는 대신, 차를 화물열차에 실어 나르도록 한 것이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차는 오른쪽 차로를 타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차는 왼쪽 차로를 탄다. 그 나라 교통 법규에 맞게 달리면 되는 것이다.

만약 초행이라면 오키나와의 운전자가 1978년 7월 30일에 느꼈을 법한 혼란에 잠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나저나 730 기념비를 보는 섬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것 같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당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향이 정해진 셈이니까.

같은 기억이라도 누구에게는 달고, 누구에게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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