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날에 어떤 날은

2화

by 슬그머니가마니

"김윤아 씨 맞으시죠?"


어릴 적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 동생 원이와

놀다가도 누군가 띵-동하고 벨을 누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겁먹었던 나는 여전한데 이 세상은 날 놀려먹는 게 즐거워서 나를 여태껏 겁쟁이로 살아가게 한 걸까. 마음속으로는 당신은 누구신데요?라고 힘껏 소리쳐보지만 손잡이에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걸려있지를 못 한 채로 그저 변기에 앉아 있을 뿐인 상황이었다.


드득 특 탁


손잡이가 자기 혼자 빠져나가더니 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고, 내 눈앞에는 형체 모를 검은 무언가가 떠 다니고 있었다. 그 검은 것은 나를 한번 감싸 안더니 "키킥 음 그래, 너 맞네. "하고는 내 머리 위로 머리가 2개는 더 얹어 있는 듯한 큰 키와 사과머리를 하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체취와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더욱 벙쪄 있는 와중에 "네가 이 모습을 가장 그리워하길래 요걸로 해봤는데, 별로야? 다른 게 좋아? 난 네가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도 너에게 나타날 수 있어. 한 번 말해봐! 이건 어때?"라는 말과 함께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나의 고양이 콩이의 모습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 잠시만요... 상황이 너무 앞뒤도 안 맞고 이상하잖아...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말해봐요 대체 뭔데요..?"라고 말했다.


일본이고 퇴사고 남자친구의 이별이고 아무런 잡다한 생각은 이미 배수구 속에 빠진 지 오래였고, 내 두 다리의 떨림만이 온몸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너 나 잊었니? 나랑 약속했잖아. 오늘 내가 너 데리러 간다고 했을 때 좋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그랬으면서, 흥 다 까먹어 버렸네. 너가 다 까먹었어도 어쩔 수 없어 넌 상무님 대신해서 일해야 해. 이미 휴가 나가신 지 며칠 됐는데, 내가 아이스크림 먹고 배탈이 나서 널 이제서야 데리러 온 거라 일이 엄청 쌓여 있어. 빨리 가는 게 너나 나나 좋을 거야."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해보려 했지만 대신 일을 해? 상무? 아이스크림? 모든 단어가 꿈속의 꿈처럼 맥락이 하나도 안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 아.. 일단 뭐가 뭔지부터 말 좀 해주세요. 대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뭔데요..?"


"아가씨, 가면서 들으면 될 것을 뭐 이렇게 보채는 거야~? 늦어져서 좋을게 하나도 없을 텐데? 그래 뭐 니 결정이니까. 지금 너의 삶 모든 게 다 너의 결정이었는데 이것도 못 들어주겠니? 잠시만~"

.

.

.

.

.

.

칠판을 적는 타닥타닥닥하는 소리에 눈을 떴고, 얼만큼 울었는지 시큰시큰한 느낌을 받으며

조심스레 앉아있는 상태로 몸만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담임 선생님이자 기가 선생님이 아파트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설명 중이셨고, 밖에는 비만 우후죽순 내리며 땅바닥의 흙들이 물과 함께 고이고 있었다.


저 흙들 속에서 함께 있으면 그나마 따듯할까?

요 근래 사람은 사랑을 하기 위해 외로운 것인지,

외로워서 사랑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해봤는데 결론은 차라리 외로워서 사랑을 하는 것이었으면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는 하물며 강아지도 사랑을 하는 장면을 간혹 보곤 하는데, 내가 가는 어떤 장소든 어떤 사람의 마음이든 내가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그래서 사랑을 하기 위해 외로운 거라면 사랑을 할 수 없는 나는, 사랑이란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 외로움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기에 외롭기에 사랑을 한다라고 하고 싶다.


외로워서 사랑을 하는 거라면 나를 안아줌으로써 누군가 보기엔 비루한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나의 사랑으로 나를 보살피면 되는 거니까.


엄마의 아이들은 지금 우산을 가지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달려가고 있으려나? 아빠는 갈색머리 아줌마와 그녀의 딸을 위해 일하고 치킨 한 마리를 사서 갈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그저 나는 숙식과 학업에 들어가는 돈에 대한 지원을 그들만의 사랑이니까 나는 좋아 그나마 복 받은 거지 하고 수업이 끝나는 소리와 종례는 패스 할 테니 조심히들가라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참을 멍하니 밖만 바라보았다.


문뜩 매점을 갔다가 신발끈 묶느라 복도 창문 끝에 둔 지갑이 생각이 났다. 지갑만 몇 번째 잃어버리는지... 그래도 이번에는 금방 생각이 났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복도로 향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학교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그 나름의 조용함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지갑 찾아?"


우리 학년 중에서는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에 3학년인가 싶다가도 내가 지갑을 찾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싶었다.


"지갑.. 찾는 건 맞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학생증 보니까 사진 있던데? 아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냥 등하굣길 매일 보던 얼굴이라 한 번쯤 말 걸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내가 찾은 지갑이 너 지갑이더라고? 그래서 너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

.

.

.

누군가 나를 찾는다는 말, 기다렸다는 말이 아직 인생의 반절의 반절도 살아보지 않는 내게 까마득한 말이었고 나의 머릿속 단어로는 떠오르지도 않는 그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흘렀다. 왜 흐르는지도 모르게 펑펑 눈물만 흘렀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과 갑작스레 우는 나의 추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향기와 말투와 단어가 나를 서 있게 해 주었다.


-어떤 날에 어떤 날은-2화 마침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