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에서 내려요

2024 작가의 눈 제31호 (2024. 10. 28 杏仁 )

by 행인

당신 좇아 올라탄 전동차에는

빈 좌석이 없네요

나란히 앉을 자리 아예 없네요

우리, 이대로 서서 가야 하네요


2번 객차 칸 가운데 출입문 앞

은빛 차가운 기둥 붙든 당신은

어둡고 까만 차창 응시하네요

거울을 보는 듯이 정면 보네요


당신께 다가선 나, 잡을 바 없어

두 다리 겨우겨우 버텨 섰네요

차창에 비친 당신, 눈 내리깔고

앞만 보며 모른 척 나를 보네요


고개도 안 돌리는 당신이지만

안 보는 척하면서 나를 보네요

나를 보고 있네요 다행이네요

당신 차마 못 보는, 나도 알아요


고개도 안 돌리는 당신이지만

당신께 말하는 나, 당신 듣네요

내 말 듣고 있네요 다행이네요

하나도 빼지 않고 귀에 담네요


드디어 당신 내게 말을 하네요

당신 말, 한마디가 내게 들려요

나를, 다가오기를, 기다리다가

당신이 내릴 역을 지나쳤다고요


그럼 당신, 나하고 함께 내려요

이제 이번 역에서 우리 내려요

내려서 함께 가요 저 빗속으로

내려서 우리 함께 밤길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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