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일이 많지 않았다.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간 읽겠지, 생각해서 가져온 책을 펼쳤다.
첫 장을 읽으려는 순간 갑자기 엉덩이가 가벼워졌다. 한 시간 후 벌어질 일에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큰 폭풍우가 세게 몰아쳤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서류를 들고 옮겨 다니고 뒤죽박죽 된 내용을 수정하고 정신이 없었다. 예상을 할 수 있는 일은 대처가 가능했으나 예상을 뒤엎은 다른 일들은 처음 겪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비하여 안전한 삶을 원하는 나의 바람은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넘어설 수 없는 일이란 없다. 무슨 일이든 주어진 책임만큼의 일로 다가오는 건 아닐까. 한 번의 폭풍은 어찌어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나갔다.
쉼의 시간이 돌아왔다. 내 몸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은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내 몸을 찾아 돌아오는 누군가를 붙잡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떠난 마음이 이제야 돌아와 제 자리에 앉았다. 물 한 잔 벌컥 마시고서는 책을 다시 꺼냈다. 해결한 마음이 가벼워서일까. 내용이 재미있어서 한 장 한 장이 술술 넘어갔다. 나와 같은 상황이구만, 공감하며 읽을 때쯤 상사가 한 움큼 서류를 내 자리에 턱 얹었다. 내 할 일은 전혀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몸짓을 표현하는 것 같아 흔쾌히 돕기로 했다. 평소에 도움을 받이 받는 사람이니 어떠랴.
이름이 겹치지 않게 여러 분기를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다.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명단 정리가 쉽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을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아, 나도 그럴 나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이런 일을 했다면 훨씬 수월하게 했을 텐데. 여러 생각은 잠시 나를 또 다른 유체이탈을 불러왔다. 계속하다 보니 단순작업이라는 걸 느꼈다. 결국 이 일은 빠른 손놀림이 필요했다. 조금만 집중을 해도 눈이 침침 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건 극복 가능한 문제다.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엉덩이를 꾹 붙여 서둘렀다.
나의 퇴근 시간은 4시 40분에서 5시경이었지만 5시를 넘어섰다. 일을 네 시 반에 가져다주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겨울이라 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음만 급하고 쉬이 끝나지 않았다. 사실은 운이 좋지 않은 날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기 전에 갈 거라는 기대감이 나를 기분 좋게 하고 있던 터라 어둠에 대한 작은 슬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슬픈 만큼 더욱 재빠르게 손을 썼다. 내가 빨리 하는 만큼 일은 빨리 끝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손이 더 빨리 일하기를 바랐다.
5시 30분을 겨우 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나의 능력치가 상승되었다. 자화자찬하며 퇴근하려 건물을 나왔다.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젖어 있었다. 언제 비가 왔나. 원래의 퇴근 시간에 나왔다면 비를 펑펑 맞았을지 모를 일이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안도의 헛숨이 쉬어졌다. 며칠 전에 비 오던 날 우산을 두고 며칠 다니다, 어제서야 우산을 챙겨 집에 모셔둔 일이 기억났다. 늦게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지 않아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골목길을 나서자마자 운이 좋다는 생각은 쏙 들어갔다. 눈앞에서 마을버스가 쌩 스쳐 지나갔다. 내 마음은 참 갈대와 같구나. 이랬다가 저랬다가 순간의 기분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가. 10분은 더 기다려야 될 거라 생각해 큰길로 걸어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비에 젖은 은행잎을 밟았다. 사방은 어두운데 낙엽은 빛이 났다. 금색의 은행잎 낙엽이 좋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듯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모습에 감성이 차올라왔다. 갑자기 가로등이 켜졌다. 물론 가로등은 시간이 되어 켜진 것이리라. 그래도 나만을 위한 옐로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분위기에 취했다.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했다. 그럴만했다.
4차로의 길로 나서자마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눈앞에서 또 한 번 쌩하니 지나갔다. 또 놓쳤다. 정류장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다니. 정말 운이 없구나. 정류장의 안내판을 올려다봤다. 잠시 후 다가오는 버스는 다름 아닌 처음에 놓쳐버린 번호의 버스가 아닌가. 전의 정류장에 그대로 있었다면 편안하게 다음 버스를 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반면에 잠깐 걷는 동안 은행잎 카펫이 깔린 길을 멋스럽게 걷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겹쳐졌다.
저쪽 골목에서 연둣빛의 버스가 보인다. 매일 만나는 반가운 마을버스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 인생은 늘 새옹지마의 연속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