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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Mar 15. 2023

바람직한 소통을 위한 성찰 노트

셋째,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B 씨는 아들을 결혼시킬 때 계획이 하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사는 것이었죠. 현실적으로 같은 층에 살 수는 없었지만, 아들 내외와 위층과 아래층에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내외가 결혼식을 하기 전부터 자신의 이런 계획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며느리도 심지어는 아들도 약간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B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면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도 수시로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고, 며느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화목하고 완벽한 가족인지 말이죠. 사실 얼마 전부터 주변에 가까운 친구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신혼살림을 말이죠. 부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친구들 모두 부러워했죠. 가끔 며느리와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라도 하면 B 씨는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사실 B 씨는 며느리가 불편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밝고 명랑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예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는 며느리의 태도가 몹시 불편하게만 느껴집니다. 아들의 집에 갔을 때도 그랬어요. 생각보다 잘 정돈된 거실 소파에 앉아서 B 씨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며느리가 차려준 음식은 싱겁고 어딘가 설익은 느낌이었어요.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B 씨는 시큰둥하게 몇 시간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나름 자신들의 가정을 일구고 있는 아들 내외의 모습에 어딘가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아들 내외가 영영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 내외는 결혼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데 이렇게 아이를 가지고 완전히 가정이 꾸려지면 아들은 영영 독립해서 살아갈 것만 같습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조리도 해 주고 싶고, 아들에게 그런 싱겁고 설익은 음식 말고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이고 싶은데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불편합니다. 자신도 며느리가 편한 게 아닌데, 그걸 감수하고라도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함께 살자고 이야기할 때마다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아들 내외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친구가 자꾸 떠오릅니다. 자신도 그런 완벽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욕망과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욕망은 때로는 간단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이 그렇습니다. 내가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의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절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생각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이 크고 복잡할수록 우리의 시야는 좁아집니다. 눈 옆을 가리고 앞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처럼, 오로지 목적을 향해 달리게 됩니다. B 씨는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주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이웃을 돕거나 배려하는 일도 많이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상처 주는 일도 좀처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까요. 주변에 사려 깊은 사람들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 환경변화에 민감하고, 주변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주변사람들의 환경과 나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실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B 씨가 위선적인 사람이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매우 선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피곤한 사람입니다. 주변 시선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경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상적인 사람의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려고 하는 B 씨의 욕구는 그녀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에는 다른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평생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에 최선을 다한 그녀의 희생은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그녀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어느덧 남편이, 자녀가, 며느리가 각각 다른 객체라는 점을 잊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바라는 이상적인 목적은 어느새 가족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가족의 목적이 되어 버리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며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좋지 않은 수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녀는 정말 행복해질까요? 

C양은 매우 모범적인 부모님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녀가 좋은 성적을 받아오거나 상장을 받아올 때마다 그녀의 부모님은 직장 동료나 가족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고, 그녀에게도 칭찬과 보상이 뒤따랐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을 몹시 사랑하고 존경했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무엇이든 열심히 했습니다. 공부도, 각종 대회도. 다행하게도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넘어가는 동안 위기는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에게는 큰 문제였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격려하기를 그치지 않으셨고, 그녀는 그 격려를 원동력으로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는 성적을 얻었습니다. 부모님은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모일 때마다 그녀의 자랑을 했고,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런 그녀의 부모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큰 문제가 없었던 그녀는 대학 진학에 대해 구체적인 것들을 결정하면서 큰 벽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학과를 가고 싶은데, 어떤 대학을 가고 싶은데 성적이나 다른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실망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그녀는 성적은 충분했지만 가고 싶은 학과도 가고 싶은 학교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평소에 많이 이야기하던 학과와 희망을 습관처럼 적어서 제출하기는 했는데, 그 학과로 진학해서 6년을 공부하고 관련 직장을 얻어 평생 살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의 바람은 사실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녀가 부모님이 원하는 학과를 가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 모두 그녀를 인정할 것이고 칭찬할 것입니다. 남자친구에 대한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최근에 생긴 남자친구는 그녀보다 성적이 낮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고 싶은 학과가 명확하게 있고, 하고 싶은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그녀의 남자친구는 부모님이 정한 기준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소소한 반대가 있을 것이고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갈등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주 가끔 보내오는 실망의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내는 분노의 원인은 아이들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이미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화가 난 상태로 집에 들어옵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오늘 좀 고된 하루를 보냈을 수도 있고, 다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친구의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았다거나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그 분노는 가족을 향합니다. 그중에서 평소 갈등이 많았던 아이들이나 배우자에게. 그 분노나 화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사람들은 화나 분노를 해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분노를 접하면 분명히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분노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아이들은 점차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은 아이들의 모습은 다시 부모님의 분노를 불러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아주 어린 시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비난을 듣거나 영문을 모르게 혼났을 때, 얼마나 죄책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아팠는지, 얼마나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는지 말이죠. 사실문제는 순응적인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부모님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합니다. 그 욕구는 사소한 것부터, 인생을 좌우할 만한 것까지 다양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부모님은 자신의 지시를 잘 이행하는 아이가 기특하고 착할 뿐이고, 자녀는 문득문득 가슴이 답답하지만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기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단 한 번의 갈등이 파국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런 파국을 본능적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렇게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아이들이 사춘기가 없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부모님들은 부러워하죠. 하지만 사춘기가 없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일에 빠져 조용히 시기를 보내기도 하고, 외부에서의 문제를 집에까지 가져오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 겪어도 되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춘기의 욕망은 분명 언젠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를 뿐이죠.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물론 그 의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는 것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조건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인정받기 위한 삶은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의 이런 태도가 우리의 아이들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사람으로 기르고 있다면요. 


사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인정하도록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포기하거나 미루지 않고 건전하고 정직하게 이루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해서 조금은 제멋대로 행동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믿고 바라보기만 해주어야 합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아이의 모습은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건 어쩌면 내가 과거에 되고 싶은 모습이거나 과거의 나의 모습이거나, 현재의 나의 모습이니까요. 아이는 엄연히 다른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이유 없는 분노에 노출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대상이 부모라도 말이죠. 우리가 아이를 아이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아니 어렵다면 최소한 나의 시선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그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는 나의 시선이라면 더더욱. 아이가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필요 없는 시선에서 지켜주세요. 


나에게 인정이 필요하다면 그 대상은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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