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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유 아빠 Feb 07. 2023

바람직한 소통을 위한 성찰

둘째, 생각보다 흔한 무지에 대해

A 씨는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한 잔 내리고, 빵을 꺼내 데웁니다. 빵을 담았던 비닐을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버리려다가, 문득 분리수거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납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비닐을 따로 분리하고는 빵과 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조용합니다.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찾는 사람도 찾을 사람도 없는 아침입니다. 습관적으로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유럽의 여행지가 나옵니다. 프랑스에 몽생 어쩌고 하는 지명에 그의 고개가 돌아갑니다. 카메라는 작은 도시만 한 수도원의 성벽을 비추고 잠시 후 도시 전역을 보여줍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분주한 도시입니다. 그의 시선이 화면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문득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들지 않던 생각입니다.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난다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빵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집어듭니다. 잘 들어보지 않은 도시의 숙소를 검색해 보며 그는 일요일 오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식탁에는 먹다만 빵과 식은 커피가 여전히 올려져 있고, 평소 그의 아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침대 위의 이불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침대 위에도, 소파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식탁 의자에 기대앉아 스마트폰을 만지는 그는 혼자입니다. 그는 이혼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돌싱입니다. 


매우 짧은 연애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에게 불만이 그리 없었습니다. 친구에게 소개받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무엇을 하든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이 그냥 좋았습니다. 단지 아주 가끔 그녀의 말들이 그를 불편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한국을 떠나서 살고 싶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캐나다나 유럽 어딘가를 이야기한 적이 많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은 모호한, 혹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녀가 어딘지 모르는 다른 나라를 이야기할 때면 답답함이나 불편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들의 데이트는 늘 길지 않았는데, 그건 그녀를 지켜주려는 그의 배려였습니다. 문제는 그런 배려를 그녀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지만, 그는 그녀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 곧장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결혼하기 전 육 개월 동안 그는 늘 그렇게 데이트를 마무리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 그는 한 번도 집에 늦게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퇴근함과 동시에 그는 집으로 향했고, 주말에도 외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그는 씻고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소파나 식탁에 앉아 그녀가 저녁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삶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감정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오고, 아내의 곁을 지키는 것이 그의 애정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때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외출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말에 멀리 여행하고 싶어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친구들을 만나러 저녁시간에 외출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름과 겨울에 그녀의 가족들과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고, 특히 외국에 멀리 여행하고 싶어 한다거나 여전히 외국에 가서 살고 싶어 하는, 멀리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막연한 답답함으로 남아 있던 그의 감정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분노를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늘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는데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그를 점점 못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냈고, 그는 그런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분노가 원래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람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먼저 분노를 하고, 분노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에서 분노의 원인이 되는 것을 찾아냅니다. 대부분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이고 상대방은 사소한 것으로 화를 낸다고 여기고 또 분노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분노는 그 사소한 원인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분노해 있고, 단지 그 분노를 표출할 계기를 상대방에게서 찾는 것일 뿐입니다. 정작 분노는 스스로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늘 그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분에 그의 분노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지 2년이 못 되는 어느 날 그녀는 짧은 편지를 남기고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그의 마음은 늘 진심이었기 때문에 잘못은 그의 마음에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분노가 잘못임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잘못은 아닐 듯싶습니다. 그의 잘못은 바로 '무지'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없음, 다시 말하면 아내에게 공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A 씨의 진심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사실 그는 아내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과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문득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를 이해하고 배려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이해와 배려는 그를 향하기보다는 나를 향하기 마련입니다. 아내가 너무 좋아서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아내의 곁에 머물러 있는 A 씨의 마음은 진실하지만 그는 아내 곁에 머물면서 집안일을 도와준다거나 아내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내 곁에 머물고 싶어 했고, 그게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많은 남성들이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니까요.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한 것이죠. 사실 집안일을 끝이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늘 있고, 아무리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해도 끝나지 않죠. 반복됩니다. 그것도 사실상 영원히. 그래서 집안일의 분담이 필요합니다. 사실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바라봐주는 남편의 시선이 아니라, 그 끝없는 반복에서 잠시 여유를 갖게 해 줄 남편의 손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A 씨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늘 일하느라 바빴습니다.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큰돈을 번 적도 없고, 큰 재산도 받은 적 없는 전형적인 중산층인 그의 부모님은 늘 시간을 쪼개어 썼고, 스스로가 노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멀리 계곡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족 나들이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에게 여행은 큰 감흥을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익숙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 불안감이, 아내에 대한 공감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의 불안감이 조금만 낮았다면 여행의 즐거움을 조금만 알고 있었다면 아내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 아내의 답답함이 조금은 줄 지 않았을까요? 시댁은 가까이에 있었고, 친정은 멀리 있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에게 아내는 낯선 누군가가 되어 있었고, 아내에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A 씨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가족을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가족에게 분노하는 경우도 사실 꽤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나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아내나 남편이 나의 의견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화가 치민적이 없는지. 다시 생각해 보세요. 아주 사소한 의사소통에서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촉발된 적이 없지 않은가요? 특히 자녀에게. A 씨는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사회적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었고, 자녀들의 의식주를 철저히 해 주었으며, 특별히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아이들과 모인 저녁에 풀어놓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부의 의견 충돌 때문에 종종 다투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반론을 제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우리 아이들은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는 아이들'로 모두에게 소개했습니다. A 씨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대화라고 부르는 일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적으로 동의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생활 태도를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정서나 생각이나 기분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무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슬픈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는 요새 아내를 닮아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이혼 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이혼한 아내를 헐뜯는 모친과 심하게 다툰 후, 혼자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분리수거를 하고, 빨래를 정리하며 문득문득 아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와 헤어진 후, 그는 그녀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자신의 분노와 그녀에 대한 원망이 지워진 후 자신이 그녀와 이미 닮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사실 그녀와 다투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아내와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A 씨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가족에 대한 강압적인 태도가 수많은 A 씨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반론하는 것을 꾸짖지 마세요. 배우자가 자신의 의견이 반대하는 것에 분노하지 마세요. 그냥 서운하다고 표현하세요. 스스로도 모르는 강압과 분노는 가족의 마음을 닫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무지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돌아보세요. 내 안에 무지가 있지는 않은지, 가족에 대한 공감을 방해하는 무지가 있다면 알기 위해 노력하세요. A 씨는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과 다툴 수도 있고, 멀리 여행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더 멀리 여행을 또 떠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에게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늘 진심이었음에도. 


공감을 방해하는 무지는 생각보다 흔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무지가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 무지를 나의 가족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가족' 혹은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배려가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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