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수십 번 썼다가 지웠습니다. 처음에는 '올바른'으로 했다가, '자녀와'로 했다가 결국은 바람직한 소통으로 결정했습니다. 올바름이란 윤리적 정당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통에는 윤리성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윤리성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학위도 없고,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전문적 교육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멀리 돌아간다면 그와 유사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학위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늘어놓는 이야기는 그런 학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초등, 중등 과정 국어에 공감하며 말하고 듣는 방법을 공부하는 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론적으로나마 다른 사람의 말에 공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나마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는 의사소통의 방법도 배우고 있습니다. 물론 실생활에서 그런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필요성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우리들보다 조금은 나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어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런 말투도 생각보다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 자신들의 말을 사용하고, 당연히 어른들과 있을 때는 충분한 자제심을 활용할 줄 압니다. 물론 그 자제심이 어른들이 지닌 아주 견고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는 너무도 부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이해심을 발휘하면, 어른들과 매우 다른 언어나 문화 속에 어른들과 많이 다르지 않은 윤리성이나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어른이 되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며 소통하기를 배울 때, 필연적으로 교사들은 바람직한 의사소통의 예와, 바람직하지 못한 의사소통의 예를 가져오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는 어른과 아이, 정확히 말하면 학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주 조금만 공감해 주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하자'라는 말이 얼마나 숨 막히게 다가오는지, 장래 희망이나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른들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변하는지, 일상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일, 특히 이성친구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어른들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른들의 이야기에 반론했을 때 어른들이 얼마나 무섭게 돌변하는 지를 털어놓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부모님과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어른들이 얼마나 사과를 하지 않는지, 인정을 하지 않는지, 아마 부모님의 입장에서 보면 큰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옹호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의사소통의 불편함과 마음의 답답함은 아이들의 것만이 아니니까요. 그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단지 우리는 아이들보다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갖지 못할 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줄 압니다. 그 방식이 좀 퉁명스럽거나 공격적이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것일지라도요. 그리고 그렇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이 집에서 부모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 나름의 배려일 지도 모릅니다. 가끔 저도 저의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으니까요.
지난여름 나름 큰일이 있었습니다. 의사소통의 부재라고 부를만한 일이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뒤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정말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셋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리고 원망을 멈추고 성찰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저의 주변에 있는 일과, 멀리에서 있는 일,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들을 성찰하고 여러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글로 표현하다가 다시 지우기도 했고, 잠이 들지 못한 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결국 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글을 썼을 때, 저는 글을 통해 치유받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나'를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내가 잘하는 이야기를 하고, 솔직히 조금은 아름답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프로필 사진에 아름다운 가족사진을 올리는 것처럼, 매우 능력 있는 보호자인 것처럼 적었고, 솔직히 그것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은 저를 위한 글일 뿐이고, 다른 누군가는 저의 이야기를 보면서 제가 의도했던 감정과는 다른 느낌을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저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뭐라고 이런 선언을 하는지, 매우 부끄럽지만, 저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사과할 줄 알고, 인정할 줄 아는 부모, 아니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열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산부인과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아내의 배는 나오지 않았는데, 초음파 속에 아이는 저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초음파만 비추면 얼굴을 가려서 좀처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 아이는 멋진 콧뼈를 뽐내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멍하고 아내와 의사 선생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어제 둘째 아이를 혼낸 기억이 저 깊은 곳에서 불편하게 올라왔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저는 별로 친절하지 않은 아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아침에 저를 안아주는 것은 아이들이 저보다 나은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면 언젠가 온전히 다른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적을 수 있을까요? 막내가 딸인 것 같다며 즐거워하는 아내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