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칼국수 한 접시(?)를 만들어 냈다.
그것도 비행기에서.
가끔, 아주 가끔, 아기가 없는 예비 아빠들이나 이제 곧 아빠가 될 사람들이 물어오는 질문이 있다.
아빠는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힘!'
아이들이 올라타는 일은 예고도 시도, 때도 없다. 잠깐 스트레칭을 하려고 정갈하게 앉아서 팔을 쭉 펴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어깨에 올라탄다. 모처럼 소파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어디선가 공격적인 음성이 들리면서 아이들이 뛰어올라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부엌에서 무엇인가를 자르고 있을 때, 아이들이 양다리에 매달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두 아이가 한꺼번에 올라타기도 하고,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행군 아닌 행군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아빠들의 힘은 아이들과 놀아줄 때뿐 아니라, 아이를 씻기거나 아이를 먹이거나, 안아서 재우거나 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도망가는 아이를 강제로 소환할 때도 아주 유용한 기능이다. 물론 가끔 힘을 너무 쓰다가 물건을 파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빠가 힘을 사용하면 아내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요즘에는 작은 아이가 로봇이 나오는 만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싸움놀이를 자주 하고 있다. 싸움 놀이가 건전하냐의 여부를 떠나서, 이 놀이가 가진 불공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큰아이와 놀이에서 가장 곤란을 겪었던 것은 역할놀이였다. 여자 역할을 할 때, 여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큰아이는 사정없이 NG를 외쳤고, 그래서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한꺼번에 여러 역할을 해야 하는 일이 정말 진땀이 날만큼 나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나를 구원해주고 집안일의 세계로 인도해주곤 하셨는데, 둘째 아이의 경우는 그런 자비를 바랄 수 없었다.
일단 아내는 아주 약한 체력과 여성스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으므로, 작은 아이의 막무가내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아내가 공격받고 있으면 그것을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은 내가 되는 것인데, 나는 때릴 수 없고 상대방은 나를 때리고 누르고, 찰 수 있으니 그리고 심지어는 그렇게 당함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나쁘지 않으니 이 놀이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불공정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놀이 때를 제외하고서도 아이들은 나를 짐차처럼, 기중기처럼, 놀이매트처럼 사용할 때가 많다. 부르기만 하면 달려오는, 말도 하고 간식도 사주고 밤낮으로 이용 가능한 놀이시설처럼 말이다.
아내의 역할은 주로 지시와 감독이다. 아내는 힘도 좀 없는 편이고 몸도 약한 편이라 지시를 하면 나는 이행하는 편인데, 이 지시라는 것이 대부분 합리적이고,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일방적 지시에 반항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보기도 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우리 가정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는다.
두뇌는 아내가 힘은 내가. 우리 가정의 번영을 책임지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내가 짐을 쌀 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다.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인데, 주로 아이들의 물건이나 놀잇감이었다. 여행을 가면 현지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김이나 쌀과 같은 것들도 거슬리기는 했지만, 아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갖추고 있을 것이므로 짐가방을 지긋이 노려보다가 그냥 넘어갔다. 여행 가는 날 아침, 책 한 권을 넣으려고 열었던 작은 여행가방에는 조금 더 늘어나고 무엇인가 다양해진 아이들의 짐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출발 직전이었고, 무엇인가 따지고 반박하기에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의문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가방 문을 닫아버렸다.
제주 국제공항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까지는 6시간 남짓한 거리. 비행이 시작되고 큰아이는 비행기에 비치되어 있는 책자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큰아이는 이십 분가량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정신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누나를 따라 책자를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편안하게 뒤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둘째가 책을 던지기 시작한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둘째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비행기에서 잘 수 있도록 낮잠을 재우지 않은 상태였고, 비행이 시작되기 전에 양치질도 다 마친 상태. 나는 아이를 안고 흔들었고, 이로서 아이는 두 시간 동안의 수면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큰아이가 기내에 비치된 책자를 다 보고 끝말잇기 후에 심심함에 몸부림칠 때,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가방이 열리기 시작했다.
먼저 가방에서 나온 것은 책들이었다. 거기에는 큰아이가 평소에 즐겨보는 책들이 들어있었다. 책이 지급되자 큰아이는 바로 집중하기 시작했고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거의 한 시간 동안을 별다른 이상증세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책을 다 탐독하고 나자 곧바로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식사에 집중하느라 다시 몇십 분의 시간을 보냈고, 우리는 아주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아내는 둘째 몫의 식사와 아이들의 아이스크림은 일단 보류시켰는데, 큰아이가 식사를 끝내고 바로 아이스크림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지만 묻지는 않았다.
큰아이가 식사를 마치고 나자, 아내는 아이스크림을 언급하며 수학과 한글 공부를 유도했다.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에서 학습을 유도할 줄이야. 아이는 배도 불렀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순순히 공부를 시작했고, 시끄러운 비행 소음 중에서도 집중하는 놀라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둘째가 잠에서 깰 때쯤, 큰아이는 공부를 마무리하고 미리 준비했던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시간을 넘게 잔 둘째는 남들보다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스크림까지 먹이고 나자, 목적지까지는 두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둘째가 식사를 마치자 아내의 가방에서는 그리기 놀이 책이 나왔다. 둘째는 놀이 책만 가지고 거의 한 시간을 놀았다. 큰아이가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자, 아이들은 엄마의 가방에서 나온 클레이로 만들기 놀이를 시작했다. 큰아이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둘째는 행성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큰아이의 칼국수가 상당히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졌고, 작은 아이의 토성 고리가 그럴듯하게 붙어 있어서 우리는 아이들을 아낌없이 칭찬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해 있는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아이는 울고 있었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연신 달래고 있었다. 아이들은 졸려서 칭얼대고 있었고, 지루해서 칭얼대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비행기의 좁은 공간에서 그런 아이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행시간 동안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옳으냐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상황과 환경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다른 탑승객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조용히 시킬 수 있기 위해서 사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6시간 동안 부모와 아이들 모두 동영상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이들은 연신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동영상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고, 연신 칭얼대고 있었으므로.
창밖으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이 보일 때, 아이들은 클레이 놀이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아이들의 극성을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시간과 취향까지 생각한 아내의 세심함에 감탄, 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6시간의 비행에서 동영상을 최소한으로 활용하면서 아이들이 지루하거나 칭얼대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마 아내의 꼼꼼함과 치밀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늘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헌신적으로 아이들의 놀잇감을 기획하는 아내의 정성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아직 아내의 가방이 다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0일간의 여행 기간 중 아내의 가방이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을 할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동남아시아의 습하고 반가운 공기가 전해져 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내린 게이트는 실내로 이어져 있었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공항에 내부의 공기는 시원했다. 아이들은 내리자마자 넓은 공항 내부를 사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쿠알라룸푸르 공항의 광활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국심사 대기 줄은 길었지만, 생각보다 빨랐고 직원들은 친절했다. 신원확인을 위해 둘째를 들어 올리자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웃어주기까지 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미리 낮잠을 잘 재워놓은 덕에 아이들은 공항 내부에 호텔을 체크인할 때까지도 아주 살아있는 상태였고, 심지어 간식을 먹고 씻겨서 재우기 전까지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아이들은 잠시 뒤척거리다가 잠들어 버렸다. 아내의 고른 숨소리도 들리고, 실내의 에어컨을 껐지만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떠들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다들 잠들고 나자 호텔 벽에서 기계음과 같은 소음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기계음에 맞춰 서서히 잠들어가는데, 아마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에 아이들은 일찍부터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점심때쯤, 랑카위로 가는 비행기를 다시 타야 했다. 랑카위까지는 한 시간쯤, 아내의 가방에서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므로 아무 염려는 없었다. 큰아이는 음식을, 작은 아이는 행성을 만들고 우리는 아무 일없이 랑카위까지 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고운 숨소리가 든든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