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마음의 준비 없이 그날의 이야기를 적기는 불가능하다.
랑카위에서 차를 빌리자고 아내가 이야기했을 때, 솔직히 나는 표현도 하지 않았고 티도 내지 않았지만, 좀 많이 무서웠다. 이전까지 나의 국제 운전 경력은 제로. 거기다가 차선도 반대인 나라에서 운전을 하라니,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전에, 몹시 과로를 일삼던 때, 고속국도에서 서울시내로 진입하는 우회전 길에서 나는 아주 잠깐 한 0.1초 정도 졸음운전을 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직전 구간도 아니고 우회전 길에 막 진입함과 동시에 잠이 들었다는 것. 당시 나의 수면시간은 평균 4시간 정도였고, 업무의 양은 지금의 3배 정도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늘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은 생각도 못했고, 이동하는 시간은 많았다. 운전 중에 너무 졸려서 갓길에 차를 대고 오 분씩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던 때였다.
우회전을 했는데, 기분 나쁜 마찰음과 차량 진동에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핸들을 반대방향으로 꺾으며 구간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순간적으로 졸음운전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빰을 때리며 자책했고,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살짝 차가 긁힌 것 정도이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골목을 진입하면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주차를 하고 차문을 열었는데, 차 문이 열리지가 않는 것이었다. 조수석으로 내리고 돌아가 보니 차량의 좌측 운전석 방향이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범퍼부터 차량 앞 문까지 뭉개져서 문이 열리지 않는 정도로 차가 파손되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소름이 끼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랑카위에서 운전을 시작하던 때가 사실 그때만큼 무서운 순간이었다.
랑카위 공항은 쿠알라룸푸르와는 달리 아담한 곳이었다. 비행기는 한 시간 못 되는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착륙했고, 우리는 당연히 외부에 내려서 걸어 이동해야 했다. 하루 전날에는 계속 공항에 있었던 우리에게 비행기에 내려서 이동하는 오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그 뜨거운 기운은 버겁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랑카위는 사실 운전하기 그렇게 어려운 곳은 아니다. 도로의 차들은 천천히 다니고, 거리에 사람은 많지 않다. 주차할 곳도 사실 잘 되어 있고, 조금만 주의한다면 방향이 다른 것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랑카위에서의 운전은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물론 더운 날 아이들을 시원하게 금방 이동시킬 수도 있었고, 둘째 낮잠을 재울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랑카위 공항에 내리자, 짐을 찾기도 전에 수많은 렌터카 회사의 호객행위와 만날 수 있었다. 아내에게는 한국어로, 나에게는 중국어로 호객행위를 하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사실 여행 내내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이 꽤 되어 그 이후로 아내에게 내가 중국사람처럼 보이냐고 여러 차례 묻기도 했다.
직원들은 짐을 찾고 나가면 차를 빌리기 힘들다며 아주 급한 선택을 요구하고 랑카위가 처음인 우리는 그들의 의도대로 아주 성급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살펴본 바로는 해안이나 번화가에도 더 저렴한 렌터카가 많았았지만, 짐은 산더미였고, 아이 둘은 공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빠른 선택이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빨간색 일본차를 빌렸다. 사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차를 찾기는 힘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레이시아 차를 고르려고 했는데, 일본차를 예찬하는 직원의 언변에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두려움과 함께 참담한 심정으로 운전하게 되었다.
차의 미터기는 고장 나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없었고, 다행히도 차의 기본적인 능력인 앞으로 가고, 뒤로 가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주유 등도 이상했는데, 분명히 어느 정도 휘발유가 들어있다고 했는데, 운전한 지 십 오분만에 주유 등에 불이 들어왔다. 주유소를 가야 하는지 망설였는데 잠시 후에는 다시 기름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그다음 날 우리가 겪었던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랑카위에서의 첫날, 우리는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에 도착한 후 둘째를 재웠다. 숙소는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아도 시원했고, 생각보다 넓었다. 단층이어서 아이들은 집에서 처럼 뛰어다녔고, 마구 춤추고 뛰어놀다가 품에 안기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아내는 지쳐버려서 둘째와 함께 침대에 누웠지만, 나와 큰아이는 아직 여력이 있었다.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가서는 둘째가 잠에서 깨어 수영장에 합류하고, 수영과 음주를 겸하고 있던 유럽인들이 방으로 다 돌아갈 때까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들 때까지도 우리의 다음날이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나의 하루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부업을 하셨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밤늦게 들어오시는 전형적인 회사원이었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주는 월급을 쪼개서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얼마 되지 않는 월급봉투에는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거기에 따로 사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매달려 있었으므로. 우리는 아버지 명의의 집도 없었고, 돈도 힘도 없어서 남들보다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성실한 분이셨고, 가정적인 분이셨지만, 그 적은 금액에 매달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머니는 늘 초조해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을 등에 업고 돈을 벌러 다니셨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 몇 시간이라도, 하루에 단돈 몇 천 원이라도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없고 집을 나섰고, 나는 아무도 없는 시간을 집에서 혼자 지내곤 했다.
나중에 동생이 커버린 다음부터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시작하셨는데, 지갑이나 인형 손질부터 작은 부품 조립까지 다양한 일이었다. 우리 형제에게는 이런 부업들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놀이처럼 되어서, 학교를 다녀와서 숙제를 하고 나면 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 이런저런 일들을 묵묵히 함께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얼마 안 되는 일당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간식 살 돈을 빼서 평소에 잘 먹을 수 없는 간식들로 냉장고를 채워주셨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순조로운 부업 놀이는 늘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시간쯤 끝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참 화를 잘 내지 않으시는 분이다.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은 것은 초등학교 때 딱 한 번인데, 회초리를 딱 세 대 때리시고는 잠시 후에 약을 가지고 방에 들어오셔서 묵묵히 종아리에 발라주셨다. 미안하다고 말씀은 없었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는 나도 동생도 그 누구도 때리지 않으셨다. 사실 화도 잘 내지 않으셨고.
그런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경우가 바로 어머니의 부업이 들켰을 경우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퇴근하실 시간이 되면 우리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집안 정리를 시작하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화를 내시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결혼을 하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어머니가 부업을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부업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구세대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구세대였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비난을 듣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는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혔다. 화를 낸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지만, 화를 내는 마음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이 아팠다.
자기 옷 한 벌도 마음 편하게 사지 못하는 모습에 가슴 아팠고, 둘째를 낳고 어디에선가 얻어온 옷들을 빨면서 좋아하는 모습에도 가슴 아팠고, 화장품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다시 뺐다 주문했다 취소했다 하는 모습에도 가슴 아파했었다. 연애할 때 입던 10년이 지난 옷을 버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오랜만의 해외여행에서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는 모습에도 가슴이 아팠다.
아내는 쌀과 작은 냄비도 짐에 넣어 왔고, 간단한 반찬도 챙겨 왔다. 그리고 랑카위 첫날 우리는 냄비밥에 현지 음식을 포장해서 먹었고, 나는 심부름값으로 맥주 3캔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여행 전 예비비를 적당히 챙겨 왔기에 조금 불만이 있었지만, 반역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항명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쌀로 만든 냄비밥을 너무 잘 먹었고, 나도 그랬으므로 나는 그냥 간단히 수긍해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렇게 절약하는 아내 스스로의 마음이 사실 더 힘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사실 내가 현지에서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아내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랑카위에 도착한 그다음 날,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서로 알게 되었고, 우리의 여행은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