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by 지승유 아빠

해남의 바다는 넓고 육지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이른 아침 아이들이 눈을 떴다. 당연한 것처럼 아이들은 엄마에게는 이불을 덮어주고, 아빠는 깨웠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나간 곳에는 멀리 바다가 있었다. 전날에는 늦은 밤에 도착하느라 몰랐는데, 아주 멀리까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바다는 강처럼 포근하게 섬과 육지의 윤곽에 잘 닿아 있었고, 바다에서 꽤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뭔가 늘 분주해 보이는 서해바다와도 사람의 접근을 꺼려하는 듯한 동해바다와도 다른 남해바다였다.


제주도의 바다는 늘 곁에 있지만 함께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섬과 바다는 늘 단절되어 있고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바다는 늘 볼 수 있지만 거리감이 느껴진다. 바다 앞에 전원주택을 짓고 우울증이 생겼다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남해의 바다는 좀 달랐다. 제주의 바다와 닿아있을 터인데 바다는 푸근하고 해안선은 부드럽다. 늘 함께일 것 같은 느낌의 바다이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의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종일 습도가 사람들을 괴롭힌다. 햇볕이 보이지 않는 흐릿한 하루가 한 달가량 지속되어 아이들의 빨래는 건조기나 제습기 없이 해결해낼 수가 없다. 우리가 해남에 도착한 것은 그런 한 달을 보낸 직후였다. 제주를 출발하는 날까지도 비가 올 듯 100%의 습도를 제주는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고 햇볕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해남은 바다와 햇볕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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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한옥이다. 물론 에어컨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방에는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책들도 충분히 있다. 문을 열면 사방에서 푸르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밤에도 자연바람에 의지할 수 있었다. 완도에서 거리상으로 멀지 않아서 결정한 곳인데 멀리 바다를 안고 있고 가족 모두 좋아했다. 아이들은 텃밭을 뛰어다니며 곤충들과 노느라고 야단이었다. 아이 주먹만 한 장수풍뎅이를 쫓아다니는 듯했다. 차에서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아내를 깨우고 짐을 정리하는데 아이들이 사라졌다.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멀리 가지는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가보니, 마치 저희들 집인 것처럼 마루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단호박과 고구마, 우유로 이루어진 아침상까지 받아 놓았다. 마당에서 인기척을 하니, 내 커피까지 들고 뛰어나오며 곤충을 쫓아다닌 이야기, 텃밭에서 고추랑 상추를 딴 이야기까지 잠깐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우리 아이들은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아무나 따라가는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상대가 외국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사람에 대한 편견이 아직 생기기 전이다. 그래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모습이 예쁘다.

큰아이의 수다만으로도 하루가 가득 차서 아이의 별명을 '라디오'라고 붙여주었을 정도였는데, 요새 작은 아이도 수다에 끼어들어 하루 종일 둘이 떠들어대니 기쁘기도 하지만 혼란스럽기도 한다.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고마운 사장님과 아침을 먹고 세탁기며 건조기까지 빌려 쓰고 나서,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를 검색했다. 해남에는 김치마을에 물놀이장이 유명하다는 정보까지 얻었는데 김치마을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장님께 물어보았더니 바로 그곳이 김치마을이었다. 정식 지명이 아니니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곳이 그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인기가 있어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시설을 이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사장님 지인이 오후에 온다고 해서 예약을 미리 해놓으셨다고 했다. 우리는 오전만 놀다가 갈 것이므로 부탁드렸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허락해주시고, 직접 물놀이장까지 가서 소개까지 해주셨다.

많지 않은 숙박요금을 지불했는데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추억을 가득 안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공짜로 묵은 것 같아 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마지막 숙소도 같은 곳으로 예약했다. 우리는 전국을 돌아 다시 해남으로 와야 하는 일정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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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오전 내내 물에 들어가서 놀았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피부가 저린 느낌이었는데 아이들은 춥다고도 하지 않고 잘 놀고 있다. 물은 산에서 내려온 물을 모아두었는데 너무 깨끗해서 신나게 놀고 더 씻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아이들은 물만 봐도 즐거워했고 물이 차가워도 웃었다. 정말 수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행복해했다. 튜브를 불고 구명조끼를 입힌 큰아이는 물에 둥둥 떠 있기만 했고, 아직 물이 조금 무서운 둘째는 내가 안고 있었다. 아이는 추운지 덜덜 떨면서도 물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에서 놀 때도 간식을 먹을 때도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해서 여행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신나는 물놀이가 끝나고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마을로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그냥 동네 식당이었는데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짜지 않아서 아이들도 잘 먹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동네 노인정 근처로 이동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도 신나게 놀았다. 노인정 옆에 큰 나무가 있고 평상이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는데 놀이시설이 없어도 아이들은 나무도 구경하고 동네 개도 구경하고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양치를 시키고 차에 태웠는데 장난치던 둘째는 큰 도로로 나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큰아이도 고속도로로 진입하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잠든 아이들을 데리고 정읍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해남에서 정읍까지는 이동하는 두 시간 반 동안, 다행하게도 아이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하루 동안 물놀이 한 번뿐, 다른 곳은 구경하러 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텃밭에서 놀았고, 장수풍뎅이도 잡았고 물놀이도 신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아침 내내 멀리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햇볕을 즐길 수 있었다. 동네에서 밥을 먹고 동네에 몇 시간을 머물렀는데, 오히려 관광지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했다.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차도 곁으로 걸어 다녀도 길에는 차가 많지 않았고, 아무도 빨리 달리지 않았다. 여행 두 번째 날은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집'에 다니러 온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늘 갔던 그 동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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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바쁜 일정이 아니어서 만족해했다. 나를 믿고 다음 여행도 맡겨도 되겠다고 했고, 나는 자신 있다고 또 큰소리를 쳐버렸다. 정읍으로 이동하는 차에서 아이들은 잠들었지만 조수석에 아내는 깨있었다. 아내는 꼭 잠이 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애써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차를 처음 장만했을 때, 우리는 꽤 멀리까지 놀러 다녔었다.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정말 즐겁게 재잘거리곤 했었다. 지금은 아이들 이야기, 생활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계획이 대화의 주된 소재이지만 그때, 우리의 이야기에는 딱히 중요한 뼈대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필요 없던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했고, 서로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한참 이야기하고 생각해봐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아내는 그렇게 재잘거리다가 어느새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첫차는 아주 작은 차였고, 신호대기에서 잠든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아주 살살 운전했는데, 그게 그만 운전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아내는 정읍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주었다. 곁에서 간식도 입에 넣어주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면서. 현실의 생활은 늘 걱정이 많지만 해결방법은 마땅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번 여행기간 동안 잠시 걱정을 뒤로 밀어놓기로 했다. 날은 맑았고, 우리는 정읍에 도착했다. 큰아이는 일어났지만 작은 아이는 저녁거리를 사러 갈 때까지 깊이 잠들어서 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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