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주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아버지의 두 번째 발령지는 전주였다. 당시 나는 태어난 지 일 년이 되기 전이었고, 어머니는 20대였다. 그것도 한창의 이 십 대에 어머니는 한 차례의 유산을 경험하고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전주에 가서 살아야 했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꿈처럼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단칸방이었다. 나는 49개월 하고 하루를 산 아이였고. 한 밤중에 외할머니가 나를 깨우고 옷을 입혔을 때, 어머니는 진통 중이었다. 아버지는 급히 운전을 했고,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기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부분 부분 오래된 영화 장면처럼 기억날 뿐. 어렴풋이 신생아실의 동생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아주 어렴풋하게 금세 태어난 동생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동생이 태어난 아침에 외할머니와 함께 외갓집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제왕절개 수술에서 회복하고 동생이 인큐베이터에서 나올 때까지 김포에 있는 외가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전주에서 생활하던 일 년 남짓,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지 못하셨다. 물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었고, 어머니는 외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기 때문에.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는 너무 길기만 했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아버지는 전주와 광주를 오가며 늦은 시간까지 바빴고,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막 태어난 아이와 단 둘이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아기를 데리고 늘 밖으로 나갔다. 시장 골목을 구경하기도 하고, 집 앞에 앉아서 사람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들어와도 어머니와 나의 하루는 반이 넘게 남아있었고, 어릴 때부터 많이 울고 보챘던 나를 어머니는 버거워하셨다. 하루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울고 있는 아기를 방에 남겨 두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아기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급히 방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방에 있던 아기는 그때까지 울고 있었는데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한참을 울었을 아기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머니도 함께 울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는 이십 대 초반이었고,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과 피곤함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아직 이십대라는 나이는 외로움이나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희석시키기에는 너무 어렸고, 어머니는 그렇게 외롭고 그만큼 힘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어머니에게 전주는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에게 서울도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정서적으로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큰아이를 오직 혼자 돌봐야 했다. 물론 가끔 장모님이 오셔서 함께 아이를 돌봐주시기도 했지만, 장모님이 대구로 돌아가시고 나면 아내는 잠시 더욱 힘들어했다. 그때는 그런 아내의 힘듦이 육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조금 성장하고 나면 사라질 것들, 나아질 것들이라고 판단했다. 어리석게도 그건 육체가 아닌 정신의 피로에서 오는 것이며 정신의 피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늘 밖으로 나갔다. 늦은 시간 퇴근해서 돌아와 보면 아내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아기띠에 아기를 매고 아파트 단지를 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나도, 어머니와 아내에게 똑같은 잘못을 하고 상처를 준 것이다.
둘째가 낮잠에서 깨어나자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숙소를 예약한 것은 나였는데, 해남에서 우연히 김치마을에 숙소를 잡은 것처럼, 우연히도 절묘한 위치에 숙소를 잡았다. 우리 가족은 너무 배가 고파서 정말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숙소를 나가자마자 오른편에 전주에서 가장 유명한 콩나물 국밥집이 있었다.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쌌고, 아이들용 국밥은 무료였으며, 모주는 정말 건강해지는 맛이었다.
배를 채우고 자나 우리는 한옥마을로 직행했다. 아내는 남산 한옥마을을 생각하고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어두워진 시내를 아무런 제지 없이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한옥마을은 아이들을 현혹시킬만한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흥청거리지 않고 단정했다. 차가 지나다녀서 나의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긴장감은 온통 풀려 있었고, 아내도 편안해 보였다. 담을 따라서 혹은 길을 따라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수많은 상점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정말 잔뜩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구경하고 간식거리를 찾느라 분주했는데, 닭꼬치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해했다. 큰아이는 반짝이고 예쁘게 생긴 것을 구경하느라 아내와 둘이 정신이 없었고, 작은 아이는 길거리에 조성된 물길을 거슬러 길을 오가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혹시 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질까 아이의 손을 잡고 끝없이 물길을 걸었는데, 발은 시원했고 도로는 지나치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아서 별다른 걱정 없이 가족들의 즐거움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잡화점에서 아무거나 사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더니 몇 천 원짜리 장식품을 고르는 아이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이 번쩍이는 풍선을 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풍선을 들고 걷는 큰아이의 표정이 너무 좋아 보여서 더 이상 잔소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옥마을의 경계까지 갔다가 고기전과 막걸리, 그리고 아이들의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는데 유명한 불고기도 한정식도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고기전과 음료수를 나는 고기전과 막걸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타보고 싶어 하던 전기 스쿠터는 못 타봤지만,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간식을 전부 다 사주지는 못했지만, 전주의 밤은 나쁘지 않았다. 해가 진 후에 한옥마을은 덥지 않았다. 온통 뛰어다닌 아이들은 땀투성이 었지만 바람은 상쾌했고, 사람들의 표정도 그러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웃어주었고, 우리도 가끔 지나가는 차량 때문에 긴장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만약 어머니가 전주에 와서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면 그 시절 이십 대의 외롭고 고단했던 마음이 조금은 위안을 받지 않을까. 전주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좋은 장소는 아닐지언정, 좋은 추억 하나 정도는 안고 갈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내에 마음이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절 어머니나 아내의 외롭고 아픈 마음을 지울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꽤 많은 노력을 한다면 그 아픔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전주는 아이들과 나에게는 반짝거리고 즐거운 곳이었다.
아이들은 한참을 씻었다. 땀 투성이를 씻기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물만 보면 장난치는 아이들을 말리는 일이 더 오래 걸렸다. 아이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뜨거운 물로 장난을 치다가 씻고 말리자마자 잠들어버렸다. 창문 밖으로 도시의 소음이 오랜만에 들리고 아내도 나도 금세 아이들을 따라 잠들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여름밤이 너무 덥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져서, 전주의 힘인지, 숙소의 힘인지, 아니면 가족이 함께 누워있는 탓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은 서울로 출발해야 했는데 길고 긴 이동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하지 않고 잠들었다.
이상하게 우리는 늘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므로.
내일도 아마 어떻게든 밤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