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집에서는 로봇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들려온다.
어린 시절, 우리가 그나마 먼 곳을 갈 일은 외갓집에 다녀올 때뿐이었다. 물론 외가도 강화, 김포 지역이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잠이 들 정도 거리는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무렵 아버지는 차에서 항상 오래된 트로트를 틀어놓곤 하셨는데,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그 트로트 가사가 자꾸 들려오곤 했다.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창밖의 풍경처럼, 곁에서 이미 잠들어있는 동생의 모습처럼 자연스럽게 노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풍경과 트로트 가사와 함께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그렇게 차에서 잠이 들었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어느새 집이나 외갓집의 이불 위에 누워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고학년이 되고 키가 매우 큰 편이 되어 버린 이후로는 아버지는 나를 깨우셨지만. 그때는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가 나를 안고 옮겨주는 일이 그렇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먼 거리를 가지 않아도 잠드는 경우가 많아서 항상 점심을 먹으면 양치를 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배가 부르고 실컷 놀았다면 분명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잠들기 때문이다. 깊이 잠든 아이들은 안전벨트를 풀고 안고 집안에 들어가서 눕힐 때까지도 깨지 않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그랬다. 차에서 잠든 아이들의 몸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온몸의 힘을 빼고 온전히 나에게 기대어 의지하고 있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게 된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들으시던 제목도 모르는 트로트다.
내가 아버지의 트로트를 흥얼거리는 것처럼, 요새 우리 아이들은 내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흥얼거린다. 심지어 둘째는 나의 흥얼거림에서 틀린 가사를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노래의 힘은 위대하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의 흥얼거림에 더욱 고마워하는 것은 내가 어릴 적에 부르던 노래가 번개맨의 인기를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구에서 울주에 있는 번개맨 우주센터로 출발할 때만 해도 아이들은 번개맨을 너무너무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시크한 큰아이마저도 싫은 척하고 있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내심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태풍이 북상하고 있어서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구에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다가 접촉사고가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야 했다. 분명히 오른편에 차가 없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다른 차의 측면과 접촉해버린 후였다. 명백한 나의 과실이었다. 차가 심하게 파손되지는 않았는데, 몇 년 동안 무사고였던 기록이 깨진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체되는 시간 동안 태풍은 명백하게 우리의 이동경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울주에 도착했을 때, 태풍을 정면으로 맞이할 수도 있는 상황. 아내는 심한 불안감을 내비쳤고, 다시 대구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별다른 반박이 없다면 대구로 차를 돌리려고 했는데 뜻밖에 아이들의 격력 한 반대에 부딪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만 큰아이의 반대에. 큰아이는 외가가 아닌 다음 숙소로의 이동을 원하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누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고 있었다. 아내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서히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어느새 울주에 도착해 있었다.
요새 큰아이는 유치하다며 번개맨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 때 우리는 주말 아침에 번개맨을 함께 보곤 했었다. 번개체조 노래가 울려 퍼지면 가족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번개체조를 따라 하며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둘째의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놓는 일도 좋았고. 번개체조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둘째는 번개맨 복장으로 집안을 뛰어다니곤 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번개맨 우주센터는 꿈의 장소였다. 당시에는.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우산을 쓰는 일이 의미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비바람 사이로 계곡과 산맥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아름다운 자연 곁으로 번개맨 우주센터가 서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태풍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웃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 때문에 대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번개맨을 따라 미로를 탐험하고, 퀴즈를 풀고, 상품을 받았다. 그리고 번개맨과 우주선에 탑승해서 모험을 하고 마침내 기념품점에서 번개맨 인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험이 끝났을 때, 우리는 태풍을 뚫고 통영으로 출발했다. 작은 아이는 번개맨 인형을 꼭 안고 인형과 대화하고 있었고, 큰아이도 어느새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차에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점차 태풍은 북쪽으로, 우리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통영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여력이 없었다. 나는 하루에만 6시간가량을 운전했고, 아이들은 울주에서 통영까지 세 시간을 자지 않고 맨 정신으로 이동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지친 아이들을 달래주느라 지쳐있었다. 우리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마트에 가서 간식과 계란과 김치와 쌀을 사서,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태풍은 이미 한낮에 통영을 지났다. 거리는 젖어 있었지만 바람은 잦아들었고, 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정말 오랜만에 바다 냄새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다가왔다. 창문을 열고 바다 냄새를 맡는 아이들을 달래 식사를 했는데, 아이들은 급히 만든 김치볶음밥과 계란 프라이를 순식간에 먹고, 간식을 탐하고 있었다.
종장으로 향하고 있는 2주 간의 여행에서 아이들은 고맙게도 잘 먹고, 잘 자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숙소'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엄청나게 먼 길을 달려왔지만 아이들은 전혀 낯설어하지도, 불만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단지 숙소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예뻤고, 그렇게 온전히 의지하고 믿어주는 아이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제주에서 전라도, 서울, 대구를 거쳐 통영에 도착한 아내와 나의 마음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날씨는 덥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열심히 바다를 실어 나르는 바람이 창문 밖에서 불어오고 있었으므로. 늦은 시간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땀이 살짝 난 작은 아이의 이마가, 따뜻하게 데워진 큰아이의 손이, 그리고 그 곁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이 몹시 다행스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