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더운 여름은 그해가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왕복 2차선인 서울 변두리의 길가를 따라가면 우리가 예전에 살던 건물이 보인다. 길가에 건물이었는데, 원래 거주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중학교의 마지막 12월이었는데, 고입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 이사를 시작했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는 어머니가 준 주소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혼자 버스를 타고 그렇게 멀리까지 가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에 살아본 것도 처음이었고, 온전히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온통 이삿짐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때는 새집 증후군을 몰라서 그랬는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초등학생이었던 동생도 모두 행복하기만 한 표정이었다.
바로 그 아파트의 중도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원래 살던 반지하집 전세를 빼야 했고, 당장 살집을 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사 간 곳은 어머니의 지인이 소개해준, 보증금 없는 건물 옥탑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옥탑이지, 원래 사람이 살도록 지어진 곳도 아니었기 때문에, 급하게 기름보일러를 설치하고, 방을 나누어서 정말 '살아갈 수만' 있게 만든 곳이었다. 당시에는 도시가스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때였는데, 도시가스 보일러로 바꾼 집 중에서 등유를 사놓고 미처 다 쓰지 못한 집들이 있었다. 내가 그 옥탑에 이사 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그 미처 다 쓰지 못한 등유를 얻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기름통을 하나씩 들고, 지인들 집을 돌아다니며 기름을 얻어 우리 기름통에 붓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냥 어머니와 동생과 동네를 다니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기름을 얻어오면 어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져서 그때는 그냥 그 자체로도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옥탑 자체에 있었는데, 큰 길가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2층 사무실이 나오고 사무실 입구를 따라 한 층 더 올라가면 입구가 나오는 구조였다. 화장실은 2층 사무실과 함께 사용했는데, 이른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으면 화장실에 담배냄새가 나기 일쑤였고,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었다. 철문을 열고 나온 옥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한편에는 네 식구가 모두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큰 평상도 있었는데 충분히 커서 정말 더운 여름밤에는 모기장을 설치하고 다 함께 밖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마치 시골마을에 온 것 같았는데 바로 곁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와 밝은 가로등을 무시한다면 그랬다.
여름에는 하루 종일 볕이 가득했는데 어머니는 큰 대야에 찬물을 잔뜩 떠서 한편에 두곤 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대야의 물은 따뜻해져 있어서 그 물 곁에서 마치 시골의 마당에서 그런 것처럼 몸을 씻었다.
겨울에는 단열재가 없는 벽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들어왔는데, 이른 아침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면, 책상 위에서부터 가벼운 종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옥탑에 사는 동안에는 겨울에 늘 두껍게 입고 지냈고, 책상 앞에 앉으면 발이 시려서 나중에는 양말도 챙겨 신게 되었다.
정말 문제는 여름이었다. 몇 년 만에 가장 더운 여름이기도 했고, 내리쬐는 볕을 가려줄 만한 높은 건물도 없어서 하루 종일 옥상 전체가 달궈지게 되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섰는데, 집안은 용광로처럼 달궈져 있었고 숨이 막힐 듯했다. 집안에 머물러야 할지 밖으로 도망쳐야 할지 고민했는데, 싱크대 아래로 고무장갑이 녹아내린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 물을 뒤집어쓴 기억도 있다.
이곳에 사는 동안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생과 둘이 마구 뛰어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고, 평상에서 잠드는 것도 나중에 추억이 되었으며 편리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지낸 기억은 지금도 나쁘지 않다. 거실이 없이 방만 두 개였는데, 밥을 먹는 것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도 안 방에서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런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분리되지 않고 네 가족은 늘 함께 있었다.
대구의 폭염축제를 처음 갔을 때, 야외였지만 옥탑에 살 때가 떠올랐다.
해가 진 저녁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달궈진 아스팔트에서는 열을 뿜어내고 있었고 바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한데 모여있었는데, 더울 것을 알고 더울 것은 각오하고 있어서인지 괴로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온통 한 장소에 모여 땀을 흘리고 사방이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차서였는지, 이따금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했다. 폭염을 기념한다는 발상이 의아했는데 막상 한 밤중에 땀을 흘리고 있으니 그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서울의 옥상에서 경험했던 여름은 밤새도록 더웠고, 옥탑방 안에는 들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그래서 우리는 한데 모여 잠들 수 있었다. 평상 위에 모기장이 드리워졌는데 아주 늦은 시간까지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모르긴 몰라도 도시의 매연이 밤새 우리 곁을 둘러싸고 있었을 테지만, 그냥 우리는 뜨거운 실내를 벗어나서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동생과 나란히 누워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그 뜨거움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아침을 먹으러 옥탑방으로 들어서면 아직도 전날의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느끼고 서둘러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만약 그렇게 덥지 않았다면 몰랐을지도 모르는, 만약 우리가 조금 더 정상적인 주거환경에 살았다면 몰랐을지도 모르는 그 두 번의 여름들은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모두 잊은 줄 알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이상하게도 대구에 올 때마다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은 더운지 어쩐지도 모른 채, 수성못 주변을 뛰어다니고, 킥보드를 타다가 유원지에 설치되어 있는 이름 모를 놀이기구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용권을 사서 놀이기구를 타니 아이들은 별로 무섭지 않은 데도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 지르는 서로의 모습에 키득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온통 늦은 시간까지 밖을 활보하고 다녔다. 어른들도 피곤해서 지쳐 잠들 시간까지 할머니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돌아와서도 집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늦은 간식 시간을 갖고, 씻는데도 한참이 걸려버렸다.
이부자리 위에서 연신 키득대다가 어느새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오랫동안 소중하게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