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by 지승유 아빠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늘 일찍 저녁을 챙기는 우리의 저녁은 그날따라 조금 늦어졌다.

보통 6시를 전후로 저녁을 먹고 아무리 늦어도 7시 전에 간식까지 모든 취식을 마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이른 아침부터 출동했다가 늦은 오후에 서로 만나게 되는데, 어영부영 식사가 늦어지면 우리는 밥만 먹고, 씻고 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가족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식사 시간을 앞당겨야 했다.

앞당긴 시간은 오롯이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한 시간을 놀아도 좋고, 한 시간 동안 함께 산책을 해도 좋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나갈 수 없으면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거나 블록으로 무엇을 만들어도 좋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마 아이들이 우리와 놀아주는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식을 거절하고 배신자의 수모를 겪는 것도, 아이 둘을 씻기느라 매일 젖은 몸이 되는 것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목이 점점 아파오는 것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확실한 시한부다. 언젠가는 갖고 싶어도 오지 않는 것들이다. 언젠가는 영상통화나 짧은 안부전화로 대신할 것들이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은 막 식탁에 밥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배가 아프다는 아이를 두고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이를 들쳐 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늦은 시간이라 동네 병원은 진료를 끝냈고, 한 이십 분 정도 가야 하는 시내 병원은 아직 진료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차를 돌려 시내로 출발하는데 아이는 배가 아픈지 끙끙거린다. 아무리 요목조목 물어봐도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잘 알지 못하겠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상상은 맹장염부터 장염까지 온갖 병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내를 향하던 차가 막 집 앞을 다시 지나려고 하는 순간, 아내는 차를 집으로 향하도록 했다. 무엇인가 놓고 온 물건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내는 아이를 안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밥을 먹였다. 꼭꼭 씹어서.


잠시 후 아이는 배가 아프지 않다고 했다. 즉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팠던 것. 4살 무렵 우리 큰아이는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경험해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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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가 고픈 것을 모르는 우리 아이들은 더운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처가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청도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지기전이었다. 공원 옆으로 철길이 뻗어 있었는데 이따금 오래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바닥에서는 더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움직일 때마다 땀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꽤 넓은 크기의 공원에는 온통 장식물로 가득했는데,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그런지, 전등들은 밝지 않았고 온갖 전선들이 온통 나무를 휘감고 있었다. 아마도 불이 켜지고 나면 화려한 불빛 속에 가려질 터였지만, 그 화려한 조명들 아래로 나무들은 조명이 내뿜는 열기에 힘들어하고 조명의 빛에 혼란스러워할 것만 같았다. 입구에 들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등성이 하나가 온통 조명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해가 지고 조명이 밝아지자 아이들은 조명이 가장 밝은 곳으로 뛰어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야단이었다.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며 점차 다른 상념은 사라지고 아이들의 모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데, 조명의 색에 따라 아이들의 모습이 알록달록하게 보여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명을 따라다니며 사진 찍기 바쁜 아이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 명 씩 차례로 등에 업히기 시작했다. 큰아이가 등에 업히자 큰 핫팩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등이 뜨끈했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몇 년 만에 가장 제대로 더위를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대구지역으로 출발하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차량정체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도를 벗어나기 전에 휴게소에 들러 아이들의 배를 채웠다. 양치를 시키고 카시트를 편안한 각도로 조정한 후 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차는 막히지 않았지만 300km가 넘는 거리였고, 다행히도 배부르게 간식을 먹은 아이들은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잠들어 있었다. 대구로 가는 길은 조금 변해있었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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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를 낳고 얼마 후,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미리 입주일을 받아 놓고, 보일러를 틀어 새 집 냄새도 빼고 나름 입주청소도 하고 피톤치드도 뿌렸는데 이사 후 첫날을 보내고 난 후 큰아이는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아토피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일을 하러 간 사이,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서울 부모님 집으로 대피했는데, 그 이후로도 아내는 집 때문에 정말 많이 고생을 했다.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한 겨울에는 아기를 데리고 이방 저 방을 다니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환기를 해야 했고, 새집 증후군이 가장 심했던 안방의 경우에는 아예 아이를 데리고 잘 수도 없었다. 수시로 환기를 하고 공기청정기를 돌려도 아이의 아토피는 심해졌고, 아내는 비염이 생겼는데,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창문을 활짝 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괴로워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자고 아내는 나를 설득했는데, 그때의 나는 이상한 고집으로 그 집에서 견디기를 주장했었다. 아마 늘 집에 있지 않았던 나에게는 그 시련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무엇인가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해보면 왜 그런 고집을 부렸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경제적 손실이라는 사소한 문제보다 가족의 평화를 우선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아내는 도저히 새집증후군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되면 대구로 향했다.


주로 내가 퇴근하고 난 늦은 시간에 출발했는데, 그때 우리는 아주 작은 차를 타고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렸다. 휴게소에서 모유수유를 하고, 요기를 하고, 나는 졸음운전을 하지 않기 위해 갖가지 것들을 마시고 다시 늦은 밤 고속도로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대구에 도착해서 장모님의 그 낡은 집에 들어서면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놓고 월요일 아침 나는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서 출근을 했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주말이 되면 나는 다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대구로 갔다. 늘 도로의 차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음악과 함께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늘 무료했다. 그렇게 그 해에는 수시로 대구를 오고 갔다.


나에게 대구는 더위의 도시도, 아주 멀리 있는 도시도 아니었다. 늘 갈 수 있는 곳이었고, 편안한 곳이었다.

만약 대구가 없었더라면, 대구에 장모님이 없었더라면 그 낡은 집이 없었더라면 아내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내가 고집을 버리자, 우리는 서귀포에 낡은 아파트를 빌렸다. 그리고 아내는 대구에 조금 덜 자주 갔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고집을 버리고 아내와 아이의 괴로움에 귀를 기울였다면 마음의 평화는 조금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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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와 불빛 속에 모두 너무 지쳐버려서 시원한 음료수를 먹기 위해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모처럼 입과 몸을 멈추고 얼음이 들어간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다 마시고 나자 작은 아이는 '음료'를 연호하며 누나를 따라 뛰어가버렸고, 어른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내는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땀을 닦아주고 목을 물수건으로 연신 문질러 주었는데, 아이들인 더위를 모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이들이 배고픔을 모르는 이유도. 아내는 쉬지 않고 아이들을 쫓으며 더위를 물러가게 해주고 있었다. 조금 덥고 기분이 나쁘고 힘들어도, 먹여주고 닦아줄 누군가가 근처에 있는 것을 아이들은 아는 것이 아닐까. 힘들면 업어주고 넘어지면 안아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걸음은 늘 두려움을 모르고 거침없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위해서라면 서울에서 대구를 몇 번이라도 왕복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토록 밝게 웃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아픔을 조금 늦게 알았으면 좋겠다. 아니, 아픔을 알지만 진실로 조금이라도 늦게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언제라도 우리 곁에 와서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에어컨 가장 먼 곳에서 잠들었다. 아내는 자꾸 아이들의 배를 덮어주었고, 나는 연신 아이들이 땀을 흘리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배를 덮고 땀을 흘리면서도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마 아침에 눈을 뜨면 천지를 개벽하게 하는 천진함을 발휘할 터이지만, 그때까지 아이들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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