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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의 추억 (고2)

by 제이

내가 처음 고시원에 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아버지께서 방학기간 동안 고시원에 가서 공부해 볼 마음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당시 대학 강사였던 삼촌이 논문을 쓰려고 장기간 빌려놓은 방이 하나 있는데, 사정이 생겨 필요없게 되었으니 원하면 개학할 때까지 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고시원이라고 하면 지금과는 달리 ‘사법고시’ 를 준비하는 진짜 ‘고시생’들이 그야말로 밥먹고 공부만 하는 엄격한 절간 같은 곳이었으며, 고시원에 간다는 것은 비록 잠시동안이긴 하지만 바깥세상과는 완전한 격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기도 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마음잡고 공부도 좀 열심히 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기회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간 곳은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이층집 이었다. 도학동은 차가 다니는 큰 길에서 논둑길로 들어가 한참을 더 가야지 나오는 작은 동네였고, 문자 그대로 선비들이 도를 닦기에 좋을만한(道學) 조용한 동네였다.

마을 뒤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이 있었고, 산책하기 좋은 야산이 있었으며 작은 묘지까지 조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는 비슷한 형태의 고시원 건물이 10채 가량 있었다. 이 고시원을 운영하는 분들은 노부부였는데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인심좋은 분들이었다.

내가 거처할 방은 이층 모서리에 위치한 작은 1인실이었고, 모두 10여명의 고시생, 재수생들이 이미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여기서의 내 삶은 어떻게 될지 여러가지 잡념이 생겨 잠을 잘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시간에 부엌으로 간 나는 처음으로 원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서로를 김형, 박형, 조형, 이렇게 x형으로 부르고 있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J형으로 불려졌다.

원생 중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제일 막내였으며 어떤 형은 재학생이 이런 데를 왜 왔냐는 투로 좀 띠껍게 대하는 태도마저 역력했다. 콩나물국, 계란 후라이에 여러가지 나물반찬이 제공되었던 아침 식사는 집밥보다 맛있었고 (물론 맨날 채소만 먹다가 머리에 뿔이 돋겠다고 불평하던 고시생도 있었지만) 내 방은 노란 장판이 깔린 온돌방이었는데 가구는 이불과 좌식책상 하나 외에는 전혀 없었지만, 항상 아랫목이 따뜻해서 한 번 이불속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을 정도로 아늑한 방이었다.

같이 사는 원생들 중에는 사시 1차에만 3번을 붙고 2차에 계속 떨어진 경력을 가진 조형, 밤낮이 완전히 바뀌어 아침 저녁 식사시간 외엔 잘 볼 수도 없었던 하얀 얼굴의 곽형. 영어과목에서 계속 과락을 해서 최근 독어로 과목을 바꾸었다는 최연장자 39살 박형. 두꺼운 검은 뿔테안경에 우리가 ‘고시생’이란 단어를 보면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전형적인 고시생 이미지를 가진 조형. 마음 좋은 동네 형처럼 늘 다정다감하게 사근사근 이야기를 걸어오던 이형, 그리고 식사때마다 미국은 나쁜 놈이고 전두환은 죽일놈이라고 침튀기며 분노하던 김형. 지금 기억나는 사람들은 이정도.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는 법관이 되어 이 진절머리나는 개천을 떠나 용으로 승천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생들 이야기는 따로 한 꼭지로 분리해야될 만큼 길어질 것 같으니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며칠동안 나는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벗삼아 고시촌에서의 첫번째 주를 보냈다. 때맞춰 주는 맛나는 밥을 먹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면벽하고 문제를 풀고 있노라면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이윽고 금요일 밤, 첫번째 주말이 되었다. 그 고시원에는 삼수생 형들이 두 명 기거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파마한 머리와 얄궂은 핑크색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범상치는 않아 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부잣집 아들들인데 공부를 너무 안해서 최후의 방법으로 부모님이 이 고시원에 유배를 시켜놓은 상태였다. 용돈을 안주니 버스비도 없어 밖에 나갈 수도 없고 그냥 공부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시골이라 귀양지로는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클럽을 주름잡던 형들에게 유배생활이란 마치 하늘을 훨훨 날던 천사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과 같아서, 이들은 기회만 되면 탈출의 길을 호시탐탐 모색했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다잡고 여기를 찾아온 나와는 벌써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게다가 6,7월 정도가 되면 대입에 실패했던 아픈 경험도 슬슬 흐려지고 학력고사까지는 아직 시일이 충분히 남았으니 이미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은 흐려질대로 흐려진 상태로 보였다.

금요일 저녁밥을 먹은 후, 숭늉을 마시고 있는데 최형이라 불리던 그 키 큰 삼수생 형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J형, 고스톱 칠 줄 아니?” “아뇨, 모르는데요” “그럼 우리한테 고스톱 배워볼래?” “아뇨, 괞찮아요” 첫번째 유혹은 이렇게 무사히 넘어갔다. 그 다음주에도 비슷한 유혹이 있었다. “J형, 혹시 내일 당구치러 갈래?” “저는 당구 못치는데요”. “우리가 가르쳐 줄게”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이렇게 두번째 유혹도 잘 넘겼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매일 반복되는 공부도 슬슬 지루해지고 장마가 끝난 후 날씨도 맑아져서 바깥 세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더구나 이층 창밖으로 보면 멀리 국도에는 빨갛고 노란 색의 관광버스들이 팔공산 동화사를 향해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또다시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최형이 유혹의 마수를 뻗어왔다. “어이, J형, 우리 내일 동화사 놀러가려는데 같이 갈래?” “저는 돈이 하나도 없는데요.” “걱정마, 비용은 우리가 다 댈테니 넌 그냥 몸만 따라오면 돼”. 마음 속으론 그러면 안되는 줄 정확히 알면서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 그럼 같이 가죠”. 알고보니 그 형은 그 동네 부잣집 외동딸을 꾀어내어 가끔 데이트도 하고 용돈도 좀 뜯어내고 그랬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논둑길을 한참 걸어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동화사에 갔다. 101번 버스 안에서 형들은 한갑에 100원하던 주황색 환희 담배를 피웠고 나는 그 형들의 화려한 여성편력과 현란한 말빨에 경탄을 하며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원래 동화사 경내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야하는데, 우린 돈이 없으니 산 허리를 한참 돌아 철조망 틈으로 난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청명한 하늘 아래 따뜻한 관광지에서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도 만나보고 목어도 만져보고 사람구경하며 놀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파지기 전 까지는.

정오 쯤 되었을 때 동화사 입구 쪽에서 올라오는 세 명의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알록달록 현란한 원피스에 하얀색 챙넓은 모자로 한껏 멋을 부리고 주말 여행을 온 세명은 대학교 1-2학년 누나들로 보였다.

나름 헌팅의 고수라고 자부하던 형이 갑자기 흥분하더니 내게 말했다. “야, 잘 들어. 오늘 점심은 해결됐다. 지금부터 우리 셋은 서울에서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온 법대생이다. 알았지?” 나는 엉겁결에 팔자에도 없는 법대 2학년생이 되었고 원래 동안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라 아무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고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여대생들에게 접근한 형들은 현란한 말솜씨로 만남에 성공했고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다. 우리 셋은 법대 2학년생들인데 여름 방학에도 사법고시 준비하느라 팔공산 깊은 산 속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있다는 둥, 너무 오래 외출을 못해 몇 주만에 처음으로 바람쐬러 나왔는데 이런 알흠다운 분들을 만나게 되어 이건 천생의 인연이라는 둥, 그냥 산책삼아 나오느라 지갑도 안 가지고 왔다는 둥, 정말 소름이 돋아 계속 들어줄 수 없을만큼 낯간지러운 얘기를 얼마나 청산유수로 잘 하는지

나는 그냥 형들이 열심히 푸는 구라에 박자만 맞춰주었고 형들은 계속해서 신들린 듯 썰을 풀어서 결국 커피, 산채비빔밥은 물론 동동주까지 얻어먹었다. 그 여학생들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들로 대학 2학년생이라고 했다. 서너시간 정도 재미있게 이야기 하면서 신나게 놀고 연락처를 주고 받은 후 우리들은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그 삼수생형들과 노는 재미에 빠지게 된 나는 개학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마지막 3주동안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되었다. 쏘주도 홀짝거려보고, 고스톱도 배우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풋풋했던 그 대학생 누나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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