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달 전, 군대를 갓 제대한 나는 뭐든 닥치면 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고, 마치 지난 3년 동안 억눌렸던 자유를 한꺼번에 누리려는듯 매일매일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이면 YMCA에서 미국인 교수님이 지도하셨던 CNN뉴스클럽에 가고, 금요일이면 선교사님이 진행하셨던 영어성경공부클럽에 가는 등 거의 매일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며, 불러주는 사람은 없지만 혼자 몹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데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다양한 우민화 정책을 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와 해외여행자유화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프로축구와 프로야구를 동시에 즐겼던 유일한 나라였으며, 이전까지는 오직 특권층에게만 허용되었던 해외여행의 문호가 일반인들에게도 열려 해외여행이 봇물터지듯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MBC 대학생 해외문화탐방” 이라는 행사를 접하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동남아 4개국을 방문하는 패키지투어였는데 60만원 정도되는 여행경비를 주최측인 MBC와 참여자가 반반씩 나누어 부담하는 상당히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저금통장을 깨어 이 프로그램에 응모했고, 운좋게 당첨되어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참여자는 모두 40명 정도였고 MBC 모 국장님을 인솔책임자로 하여 각팀마다 팀장이 있었는데 우리팀의 팀장은 개그맨 김종석씨가 맡았다. 우리는 태국과 필리핀을 방문하고 세번째 방문국인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가이드로부터 길바닥에 침을 뱉거나 껌을 씹으면 벌금 50불,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물을 내리지 않으면 벌금 100불, 담벼락에 낙서를 하면 곤장형 등 듣기만 해도 섬뜩한 규정을 들으면서 나는 독재도 이렇게만하면 안전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수 있구나 하는 역설적인 사실에 놀라며 관광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건은 싱가포르 보태니컬 가든에서 일어났다.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은 후 자유시간이 되어 나는 혼자서 신기하게 생긴 양난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내 곁에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한국분이세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본 순간 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거기엔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옷차림과 외모가 무척 우아하고 말투에서 매력이 넘쳐나는 젊은 여성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있었다. 세련된 카키색 가디건 사이로 보이는 에메럴드빛 실크셔츠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스커트를 센스있게 차려입은 그녀에게서는 여태껏 만나본 그 어떤 이성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분위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오던 내 이상형의 실체를 현실에서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약간 상기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로 “네, 그런데요?” 라고 대답했다.
자신은 싱가포르에 사는 교민인데, 한국에서 온 젊은 남자분은 여기서 처음 만나봤다며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을 걸었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오늘 일정이 끝난 후 맛있는 수제맥주를 사주고 싶다고 해서 내가 묵고 있는 숙소 앞에서 그날 밤 9시에 만나기로 했다.
투어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분이 들떠있었고 내 심장은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린 후처럼 콩닥거리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내 이상형의 여성을 외국땅에서 만났고,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으며, 좀 있으면 단 둘이서 맥주까지 마실 수 있다는 이런 크나큰 행운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할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방에 돌아온 나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샤워를 하고, 면세점에서 구입한 아라미스 향수도 듬뿍 뿌린 후, 여행객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단장을 한채 호텔 방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텔 로비로 내려가 정문 쪽으로 걸어나가려는데 이번 여행의 총책임자이신 국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저기, 잠깐 좀 봅시다."
“네, 저요?”
“예, 저어기 대사관에서 오신 분들이 좀 만나고 싶어하는데…”
국장님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까만 양복을 입은 눈매가 매서워보이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언뜻 보기에 대사관이라기보다는 국정원쪽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가까이 가서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한 명이 명함을 건네준다. ‘주 싱가포르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 정X현’
“J씨 되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가만히 무게잡고 앉아있던 나머지 한명이 내가 곁에 앉자 코를 씰룩거린다. 음, 아라미스가 좀 과했나보다.
자칭 영사는 까만 007가방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들더니 내 앞에서 들고 흔들었다.
“ 이 사진 좀 보시죠. 혹시 이 여자 분 만난 적이 있으세요?”
앗! 그 사진에는 아까 낮에 만났던 그녀가 반듯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있었다.
“예, 몇 시간 전 식물원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사람은 현재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북한 공작원 리X희입니다.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죠. 첩보에 의하면 오늘 귀하와 접선할 계획이라고...”
그 순간 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내 머릿속에는 단지 세글자만 떠올랐다.
“미. 인. 계!”
자칭 영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늘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났더라면 최악의 경우 마취제를 마시고 납북되실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학생운동이라곤 입대 전 학교에 들어오려는 전경들을 막으려 돌멩이 몇 번 집어던진 것 밖에 없는데 설마 그걸로? 아니면 말년휴가때 백기완선생 집회에 참여해서 “군부독재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따라외친 것이 화근이 되었나? 이런저런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난 그냥 “전 학생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최근에 제대해서 그럴 틈도 없었구요.”
“어쨌든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주민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셨으므로 현행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적조치를 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지해 드립니다. 여기 이 서류에 인적사항 기입하시고 서명하세요.”
나는 졸지에 범법자가 되었고 울며겨자먹기로 서류를 작성한 후에야 그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중에 서울의 남산이나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연락이 올까봐 쫄았지만 다행히 귀국 후 한 번도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 사건은 내가 미인계에 얼마나 취약한 인간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세상의 이치는 정직해서 뜻밖의 행운이나 횡재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내 좌우명을 확립시켜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