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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0. 2019

알프스에 올라봤습니다, 열차로요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1편 - 융프라우(스위스), 취리히(스위스)

2019.07.07 융프라우(스위스), 취리히(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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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 올라봤습니다, 열차로요


스위스는 치즈, 초콜렛, 퐁듀가 유명한 나라다. 초딩 입맛에겐 천국같은 곳이다. 하지만 나에겐 천국일 수 없다. 스위스 물가는 가난한 배낭여행객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기에 매대 음식은 맛있는 그림일 뿐이다.

스위스의 흔한 치즈 매대ㅠㅠㅠㅠㅠㅠㅠ


전략적으로 아침 7시 조식 시간이 되자마자 달려가 그릇에 산을 쌓았다. 낙농업이 발달했다던데 확실히 요거트 맛이 다르다. 뇸뇸뇸. 무려 30분 동안 버터 바른 토스트, 오이와 치즈 곁들인 식빵, 시리얼 넣은 요거트, 그 다음은 시리얼 넣은 우유를 열심히 집어넣었다. 빈 생수병에 오렌지쥬스까지 챙기고 나서야 자리를 뜬다.

이렇게 세판은 먹어줘야ㅎㅎ


두근두근. 인터라켄 동역에서 융프라우까지 가는 왕복 142유로(약 15만원)짜리 산악열차를 탄다. 기차 창문 앞으로 비치는 정말 말도 안되는 광경에 아이폰 모니터를 광클하다 이제 좀 감상해야지 자리에 앉으면 환승하란다. 세번째 기차로 환승할 때쯤 입김이 나온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경량패딩을 꺼낸다. 반팔 셋, 반바지 둘, 긴바지 하나, 가져온 옷이란 옷은 다 입었지만 찬 바람은 눈치가 빨라서 반팔 사이 드러난 팔목만 집중 어택한다. 추울 지 알았지만 역시나 춥다. 나의 피는 36도라고. 하하하. 덜덜덜덜. 자체발열로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천이란 천은 다 둘렀습니다만ㅡㅠ


'어, 이게 고산병인가?'

네이버 블로그들에서 하도 고산병 준비하라 하길래 고산병 핑계로 초콜렛을 두개나 챙기면서도 고산병이 뭔지 느껴보고 싶었다. 슬프게도 난 체질인지 둔한 건지 온 몸의 촉수를 힘껏 세워봐도 뭐가 고산병인지 잘 모르겠다. 약간 띵한 느낌, 이건가. 이게 고산병이라면 이건 아프다기보단 모기가 계속 돌아다녀 짜증나는 느낌같은 거였다.

동굴같은 종착역에서 내려 전망대에 올라갔다. 충격. 날이 흐리다. 눈보라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밝을 땐 유럽 전체가 다 보인다던데 바로 앞에 있는 봉우리도 안보인다. 그제야 깨닫는다. 융프라우 관람은 날씨에 맞춰와야 한다는 것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융프라우 전망대ㅋㅋㅋㅋ


추위에 몇분도 못버텨 쪼르르 실내로 들어간다. 그래도 15만원 냈는데 만년설은 만져봐야지. 다시 눈밭으로 발을 꺼냈다. 맨발에 신은 슬립온 안으로 눈이 들어온다. 죽겠구만. 15만원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사진이라도 많이 찍고 도저히 더는 안되겠어서 돌아가려는데 한 중국인이 사진 좀 찍어달란다. 내 얼어붙은 발이 안보이나보다. 혼자 온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엉엉. 얼른 사진 찍어두고 실내로 토낀다. 추위에 약한 아이폰은 이미 사망했다.

15만원짜리 인생샷, 그리고 맨발의 패기


아이폰도 죽었겠다, 날씨는 더 어두워지고 내려갈 일밖에 없어 열차를 또 두 번이나 갈아타 내려왔다. 실망했냐고? 전혀. 알프스는 융프라우 정상 그 자체보다 가는 길, 그 2시간이 더 좋았다. 눈 앞에 있지만 믿기지 않는 그 댑따 크고 맑은 땅덩어리를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자궁 속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날씬해보이려고 다리를 힘껏 뻗어 사진을 찍는 나에게, 조막만한 뾰루지 하나에 괴로워하는 나에게 그냥 존재가 아름답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태고적 그대로의 알프스산에게 달려가며 생각했다. 나도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죽는데 왜 자연스럽게 사는 건 못하고 있나. 알프스 안에서 편히 숨쉬는 행복감에 눈을 감아본다.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알프스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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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잔액이 부족하신데요


오늘 취리히에서 잘거다. 혼성 도미토리 6베드인 호스텔인데도 무려 4만원이 넘는 미친 물가다. 내일이면 이 물가도 끝이다. 취리히로 간다니까 전철역 언니가 55유로 내란다. 8...8만원... 눈물을 머금고 카드를 내밀었다.


You don't have enough credit.


"What?"

내 신용이 왜. 하루에 너무 대형 결재가 많아서 막혔나. KB뱅킹 앱에는 분명 잔액 50만원 뜨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이야.

근데 한 가지 걸리는게 있었다. 분명 돌아가는 비행기 수수료 28만원과 독일로 가는 버스 8만원을 지불했는데 KB뱅킹 앱 최근 이용내역엔 뜨질 않는다. 뭔지 몰라도 이 앱에 떠있는 잔액 50만원은 믿을게 못되는 거다.

갖고 있던 비상금 44유로와 동전까지 털어서 겨우겨우 취리히 가는 표를 구했다. 아직 기차 출발까지 1시간 전, 부모님이나 그 아이에게 전화해서 헬프쳐야 한다.


Is there any telecom here?


하필 돈 떨어진 오늘, 그 아이가 남기고 간 유럽국가 전용 USIM칩도 수명을 다했다. 역에 와이파이는 안 터지고 한국에 연락할 방법이 없다. 때마침 일요일이라 텔레콤도 다 닫았단다. 망했다. 취리히 도착하면 스위스 기준 7시, 한국 기준 새벽 2시. 취리히 가서 그제야 와이파이를 잡아도, USIM을 사도, 새벽 2시에 카카오 보이스톡을 받을 사람이 어디있어. 종종 거리며 기차가 서는 역마다 와이파이를 잡아보지만 아이폰 위로 동글뱅이만 뱅뱅 돌 뿐이다.

반 포기상태로 취리히 중앙역에 내린다. 뭐, 안되면 호스텔에 빌어서 내일 내겠다고 해보지 뭐. 담담한 척 애써보지만 손은 분주하게 와이파이를 잡는다. 오늘따라 와이파이가 왜 이렇게 안 잡히는 거야. 와이파이 뜨는 스시집 문 앞에서도 서성여보고 버거킹에도 들어가보지만 잡히지가 않는다.

안되겠다. USIM칩을 사야겠다. 그러고보니 USIM칩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혹시 몰라 챙겨온 50만원은 세종대왕이셨다. 환전소마다 세종대왕님을 거절한다. 너네가 뭔데 우리 세종대왕님을 거절하는데. 절망적이다. 갈 곳을 잃고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오니 역 한가운데 환전소가 있다. 환율 환산표에 태극기가 보인다. 반갑다, 고맙다, 태극기야. 또르륵.

50프랑을 손에 넣고 너무 기뻤다. Sunrise라는 스위스 텔레콤에 방방 달려간다. 유심이 품절이란다. 한창 돌아다녀 겨우 찾은 텔레콤에서는 유럽에서는 안되고 스위스에서 하루 쓸 수 있는 유심뿐이라는데 괜찮냐고 묻는다.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닙니다. 무려 하루에 2만원이나 하는 유심을 샀다. 아이폰에 소중히 끼워본다. 한국과 연결됐다. 그순간 알았다. 돈과 데이터까지 없을 때 사람은 진짜 혼자가 된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도 기차바깥 풍경은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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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구세주를 보았다



엉엉, 나 진짜 놀랐어.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 그 아이는 용케도 내 카카오 보이스톡을 받는다.


걱정했어.
USIM도 끝났다고 하고.
연락도 안와서.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냐고 칭얼칭얼 그 서러움 가득한 스위스에서의 5시간을 절절하게 늘어놓는다. 쏟아내놓고 나니 제정신이 좀 돌아온다. 숙소에서 돈 없다고 쫓아낼까봐 엄청 긴장했었다.


나 10만원만...


카카오페이로 바로 송금해주는 그 아이 덕에 나는 오늘 취리히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도 유럽에서 계산한 것보다 나중에 지불한 값이 훨씬 많이 나와서 놀랐었다고 다독여까지준다. 돈에 위로까지. 나는 그렇게 오늘 인간 세상에 나타난 구세주를 본다.

혼자 여행하지만 혼자 여행하고 있지 않다. 매일 베스트 샷들을 보정까지 예쁘게 해서 실시간으로 보내며 이 아이와 함께 여행한다. 예쁜 곳을 보며 너한테 어떻게 얘기해줄지 고민한다. 너가 그 사진을 보고 예쁘다고 해주면 그때서야 진짜 그곳이 예쁘다고 느껴진다. 이건 뭐, 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는건가.

네, 남친 자랑 맞습니다만


'이럴거면 헤어져.'

스무살 초반엔 정말 남을 괴롭히는 연애를 많이 했다. 화나면 연락을 1주일씩 끊고 헤어지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그때는 상대가 나에 대한 마음이 충분치 않으면 빨리 정리하는게 이득이라는 신조로 사랑을 확인하고 시험하고 보채기 바빴다. 그런 사람한테 내 시간과 마음, 돈 등등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


나중에 어머니한테 이런 나의 '갑질 연애'에 대해 얘기하니 돌아온 답변이다. 정확했다. 갑질 밑에는 엄청 겁 많은 애가 하나 있었다. 차이기 싫어서,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러면 내 자존감이 무너져버릴 거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왔다. 첫 연애부터 8년동안 내 자존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채우려고만 했지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해본 거다.


명제 1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그만큼 사랑해주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다.

명제 2 : 상대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내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둘다 틀린 명제다. 아닌 걸 알면서 왜 늘 그렇게 느낄까. 존경하는 스님께서 사람들이 사랑으로 장사를 한다고 하셨다. 장사, 치열한 눈치싸움. 가장 이성적이지 않은게 사랑이라고 하던데 거기서 가장 이성적으로 재고 따지는건 무슨 모순일까. 이번에는 내가 달랐으면 좋겠어. 나도 계산없이 좋아할 수 있을까.

계산없는 연애, 그까이꺼 한번 해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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