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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5. 2019

뮌헨에서 USIM 찾아 사만육천보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3편 - 뮌헨(독일)

2019.07.09 - 뮌헨(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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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서 USIM 찾아 사만육천보


춥다. 아직 새벽 3시 반이네. 더 자야 해. 춥다. 아직 4시 반이네. 아, 나 도저히 못 자겠다. 결국 따뜻한 물에 몸 한번 적시곤 숙소를 뛰쳐 나왔다. 그런데 반전, 뮌헨 전체가 추웠다. 경량 패딩을 입은 시민들이 넘나 부럽다. 그렇게 새벽 6시에 님펜부르크 궁전 앞이다.

아무도 없을 때 너무너무 좋당

새벽엔 역시 아무도 없군. 궁전 앞에서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동상 옆에서 혼자 개그샷도 찍었다. 슬프게도 잠을 설쳐 퉁퉁 부은 얼굴이 아름다운 배경을 압도한다. 에잇,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뱃살은 가릴 수 있지만 얼굴 붓기는 못 가린다


다음 행선지인 영국정원까지 7.1km, 남는게 시간이니 걸어볼까. 빵집 하나가 있다. 크로아상 하나, 카페 라떼 하나. 이게 행복인가보다. 더군다나 은혜롭게도 바로 옆 호텔의 게스트전용 와이파이가 잡힌다. 오늘 가장 중요하게 해야할 일, USIM 사기. 구글 맵에 주변 telecom을 검색. 58분 걸어야 한단다. 한국엔 골목마다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립다, 대한민국.


We don't have a sim-card.


길 건너 골목 지나 드디어 도착한 텔레콤엔 유심이 없었다. 나쁜 본사에서 안 줬단다. 어디 가야 있냐고 물어도 모른단다. 또륵. 4차 산업혁명의 선두주자 독일한테 배신당함. 그래도 뮌헨인데, 시내 텔레콤을 찾아본다. 뮌헨대학교 쪽까지 42분 거리. 아직까진 할만 하다. 걷자.


얼마나 더 가야 해?


걷는 걸 좋아한다. 가고 싶은 곳을 가보면 도착했을 때보다 가는 길의 설렘이 더 좋았다. 구글 리뷰가 없어 걷지 않으면 못 만날 시크릿한 예쁜 거리나 공원안 유명한 그곳보다 더 오래오래 남아있다. 닦아놓은데 말고 인간적인 모습을 훔쳐보면서 그 도시랑 더 친해지는 것도 좋다. 물론 캥거루족 처지에 교통비가 가볍지도 않고 말이다.


차가 생기면 걷는 행복을 잃어버릴거 같아.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장기간 여행 후 상주에서 휴식하고 있는 그 애와 하루종일 놀면 3만보는 기본이었다. 걷고 걷다 예쁜 카페 들어가고. 3시간은 걸을 수 있다고 맘 먹으면 못 갈 곳이 없었다. 고급 레스토랑, 크루즈보다 카카오맵 하나 꼭 쥐고 도란도란 너랑 갈 수 있는 그 초록초록한 가로수길이 더 좋았다.

고마워요, 카카오맵!


뮌헨은 걷기에 좋은 도시였다. 쭉쭉 뻗은 잘 다듬어진 인도는 뚜벅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이다. 헤메다 예쁜 길을 발견하는 재미는 없지만 지금은 USIM이 먼저다.


걷기만 한시간 반, 뮌헨 대학교 앞이다. 캠퍼스 잔디에 앉아있는 대학생들이 무슨 EBS 다큐멘터리 같다. 난 우리 학교 잔디에서 공강 때마다 선배들이랑 고량주 깠는데, 하하. 참 철없이 사람을 좋아하던 때였지. 지금은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지만 그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잘 보면 손에 보드카를 들었을지 모른다


아, 너무 좋아!


오늘은 운 좋은 날. 맘에 완전 드는 길이다. 하늘 끝까지 닿는 가로수들이 내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은 예쁜 거리. 그 아래 브런치를 파는 레스토랑과 활기찬 시민들.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시력을 잃지 않아서 좋다. 햇빛과 바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세상 다 좋다.


밥 먹으러 나온 대학생 무리가 이 띵작과 나의 기념샷을 방해한다. 저녁에 와서 꼭 전신샷을 남겨야지. 그 거리가 나만의 시크릿이 아니라 대단한 지성인들이 애정하던 레오포드 거리, 슈바빙 지구였다는 걸 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 2주 후에 알았다.

굳이 한번 더 갔지만.. 인생샷은 없었다


O2라는 이름의 통신사에 들어간다. 통신사 이름에 폭풍공감. 데이터가 없는 하루, 나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우주 미아였다. 와이파이존이라는 우주 정류장을 간헐적으로 들르며 겨우 산소를 공급받는다. 끊겨있던 SNS를 켜 내 생존을 확인하고 포털 실시간 검색어를 보며 내 인싸력을 상승시켜 안도하고 카톡 새 메세지 알림에 다시 한번 더 살아갈 의지를 얻는다. SNS가 나인지 육체가 나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지금 SNS상 임한결을 살리기 위해서면 십만보도 걸을 수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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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평짜리 뮌헨 영국정원


발 아파. 어느새 뮌헨도 10시가 되선 텐트에서의 추위는 완전히 잊고 태양의 색을 입었다. 가게에서 1.5유로에 빵 5개가 든 특가상품을 겟했다. 영국정원 가서 드러누워서 먹을거야.

구글 맵에서 봤을 때도 어마어마하게 컸던 영국 정원은 역시 어마어마하게 컸다. 백만평이라는데 처음 들어보는 평수라 감이 없다. 잘못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는데만 몇 시간 걸릴까봐 경로를 엄청 따지는데 공원 안을 돌아다니는 버스를 보고 그냥 걷기로 했다.


그늘이 넓은 큰 나무 앞 벤치에 앉는다. 빵 하나 입에 무니 심심하다. 또 시작된 영상통화. 오래할 생각으로 삼각대까지 설치해놓고 전화를 건다.

이럴 때 말고 평상시에도 환경 사랑!


아 참, 동행들이 파리에서 한국으로 가기 전 날 나는 동선을 바꿨다. 동행들의 이탈리아 감상평에 홀딱 넘어가서 이탈리아를 가기로 한거다. 동선이 동유럽에서 서유럽 중심으로 바뀐다.

기존 : 스페인(마드리드-그라나다-세비야)-프랑스(파리-몽생미셸)-독일(프랑크푸르트-뮌헨-베를린)-체코(프라하)-오스트리아(비엔나)-헝가리(부다페스트)-폴란드(바르샤바)

변경 : 스페인(마드리드-그라나다-세비야)-프랑스(파리)-스위스(베른-인터라켄-취리히)-독일(뮌헨-퓌센)-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할슈타트)-이탈리아(베니스-피렌체-나폴리-로마)


지금 네 모습이 가장 너 다워. 더 있다 와.


동유럽을 못가는 아쉬움을 겨우 달래놨더니 후원자가 불을 지르시고 말았다. 또 허락을 구해야 할 상주 아이에게도 물었다.

"너라면 9박 10일 명상을 갈 거 같아, 유럽여행을 좀 더 할 거 같아?"
"여행할 거 같은데."

한국에서 7월 18일부터 7월 27일까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진행하는 명상수련을 신청해놓고 왔다. 물론 여행에 정해지기 한참 전 일이다. 둘 다 할 수는 없다. 일년에 한번 있는 텐데이 법륜스님과의 명상수련, 십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유럽 배낭여행. 스님께 죄송하지만 유럽 여행을 택한다.

무려 마일리지를 1.5배를 더 먹는 대한항공 마일리지 여름 성수기가 끝나는 8월 19일에 한국 가겠다고 했다가 서운해서 말도 못하는 그 애를 보곤 8월 초 복귀로 잡아본다. 영국 정원처럼 커져버린 유럽 여행 일정, 잔디에 누워본다. 크기가 클수록 관리비용은 이차함수처럼 늘어난다. 해야할 일들이 떠오르고 귀찮다. 넓고 파란 하늘 보면서 별일이냐 싶다. 배낭에 기대자마자 순식간에 잠이 든다.

서울에서도 종종 들판에서 자야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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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쁜 마리엔광장도 인스타 배경일 뿐


눈을 떠보니 2시. 아직 영국정원밖에 안왔는데, 급한 마음이 든다. 뮌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마리엔 광장으로 빠르게 향한다. 다행히 근처다.

마리엔 광장은 기이했다. 칙칙함에 알록달록함이 더해진 이상하게 예쁜 친구였다. 공포영화 촬영하기 딱 좋겠다. 뭐, 창작자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심지어 정시마다 꼭두각시인형이 나온다


넓은 영국정원에서 조절 못하고 사진 찍어서 배터리가 곧 사망한다고 인사를 건넨다. 안된다. 스위스 융프라우 가는 산악열차에서 정신없이 환승하다 보조배터리를 잃어버린 후 아이폰 충전한다고 커피값만 몇 번 냈는지 모른다.


안스만 배터리가 좋대.


왠지 독일이 전자제품으로 강할 거 같다는 그 아이가 요리조리 찾아보더니 독일산 보조배터리 후기를 보내준다. 독일제, 믿을만 하지. 중학교 때 만나 7년간 한결같은 사랑을 보낸 독일회사 펜에서 이미 독일제의 위대함을 경험했다.

통신사에서는 안 판단다. SATURN이라고 행성모양 숍에 가보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친절하게 브랜드 로고 이미지를 메모지에 그려준다. 엄청 넓은 독일의 쇼핑대로, 슈트라제 거리에서 그 종이와 닮은 전광판을 눈빠지게 찾는다. 어머, 저기에 행성이 있다. 이순간 무엇보다 귀한 20유로짜리 안스만 배터리를 손으로 안아본다.


2주 써본 결과 안스만 배터리는 충전 속도는 좀 느리지만 잘 망가지지 않고 뭔가 용량(제껀 10000mAh)보다 더 많이 충전되는 느낌이다. 별 4개반 드리겠다.

삶의 질을 높여주는 소중한 너


다시 마리엔광장에 선다. 4시가 되니 사람 진짜 많다. 광장도 크고 사람도 많고 셀카 찍기 최악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지. 그 넓은 광장의 모든 포인트에서 다 찍어보지만 만족스러운 샷은 못 건졌다.

다들 어떻게 찍는거지. 많은 여자분들이 다리를 X자로 만든다. 확실히 다리를 저렇게 앞으로 뻗으면 다리가 길어지지. 허리에 한 손 얹고 사선으로 뒤돌아 시선은 바닥을 향하는 이른바 여신 자세를 취하는 저 분은 선수다. 하지만 모델보다 사진기사의 기술이 더 중요한 시대다. 바닥에 드러눕는, 왠만큼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키 2m 만드는 사진촬영 기술을 여기저기서 선보인다. 이 기이하게 예쁜 광장을 압도하는 기이한 자세들, 자세 구경이 훨씬 재밌다.

마리엔광장에선 그 예쁜 광장을 감상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마리엔광장 앞의 자신을 감상하는 중이다. 나도 보조배터리 구매하고 각도 이곳저곳 맞춰보며 무려 한시간 동안 광장 앞 내 모습만 감상했다. 우린 육체가 아닌 인스타에서 살고 있다.

인스타용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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