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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7. 2019

뮌헨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했다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5편 - 뮌헨, 할슈타트, 잘츠부르크

2019.07.11 - 뮌헨(독일), 할슈타트(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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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했다


그렇게 힘들게 타야 하는 기차는 처음이었다.

1) 퓌센 - 카우프보이렌(59분)
2) 카우프보이렌 - 아우구스부르크(1시간 1분)
3) 아우구스부르크 - 뮌헨(32분)
4) 뮌헨 - 뮐도르프(1시간 10분)
5) 뮐도르프 - 프라이아징(1시간 3분)
6) 프라이아징 - 잘츠부르크(11분)

경유시간 포함, 총 8시간 58분짜리 기차다.

5 경유, 빛나는 나의 패기


이런 대단한 기차를 탄 이유는 딱 하나다. 표가 무지 싸다. 33박 34일동안 12개의 나라를 가는 내 여행을 200만원 예산선 안에서 해낼 수만 있다면 경유정도는 언제든지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왠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뮌헨 가는 기차가 20분 연착이다. 뮌헨에서 뮐도르프 가는, 내가 타야 할 기차가 막차라 자칫하면 첫차까지 기다릴 꼴이다. 제발 다음 차도 연착돼라. 00시 48분에 뮌헨역에 도착한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00시 49분에 떠나는 막차를 잡지 못했다.


I missed this train because of delay.


연착의 주인공 DB(유럽의 KTX) 인포메이션 센터에 하소연한다. 이미 난 연착된 기차에서 직원에게 기차를 놓치면 회사가 호텔 바우처를 줄 거라는 얘기를 들었지롱.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짓곤 당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 이제 호텔 바우처를 보여줘.


하지만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난 어차피 뮐도르프에서 3시간 반 경유였으므로 해당없단다. 새벽 5시 50분 기차를 타던지 환불하시던지라고 말하는 직원의 미소에 1의 여지도 없다. 유럽 호텔에서 한번 자보나 했는데, 쩝.

호텔 대신 나를 맞은 건 뮌헨 중앙역의 딱딱한 벤치다. 잠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새벽 1시 반, 늦은 차를 타는 사람들과 뮌헨 상주 노숙자들은 이미 취침준비를 마쳤다. 그 사이로 사람 앉을 곳도 없는데 상전처럼 앉아있는 가방에게 눈치를 줘본다. 주인 착한 가방이 일어나 자기 주인 발 밑에 눕는다.

춥다. 청년 더 텐트보다 높은 레벨의 숙박 미션은 이번 여행에 없을 줄만 알았다. 노숙을 할 줄이야. 융프라우 때처럼 온갖 천을 둘러보지만 세상에 찬 바람보다 눈치 빠른 건 없다. 빈 틈만 골라 팬다. 옆에 앉은 착한 가방 주인은 반팔 하나 입고 핸드폰 진동처럼 떨고 있다. 아마추어들의 험난한 노숙 도전기를 비웃듯 베테랑 노숙 선배님들이 검정 침낭 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청하신다.

가방을 꼭 안았다. 유럽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건 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고 실제로 상주에서 쉬고 있는 그 아이는 그리스에서, 그것도 딱 이런 기차역에서 두번이나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았다. 그래, 다른 거 다 가져가도 돼. 딱 하나, 아니 둘. 아이폰이랑 아이패드만은 절대 안돼.

새벽 2시 반, 시간이 정말 안 간다. 얼마나 추운지 밤 새는 거 진짜 못하는데 잠이 1도 안온다. 시계랑 치열한 눈싸움만 하는데 옆에 앉은 착한 가방 주인이 뮌헨 중앙역을 탈출한다. 이렇게 먼저 가기 있기 없기.

착한 가방 주인이 떠난지 삼십분이 지났는데 허연 백발 아저씨가 흐린 동공으로 손을 떨며 중얼중얼 옆에 앉는다. 소름 돋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해. 백발 아저씨가 자꾸 허공이랑 대화한다. 내가 독일어를 몰라 천만다행이다. 자리 옮길까. 헤칠 것 같진 않은데 조금만 더 상황보자. 자꾸 옆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동공을 혼낸다. 가만히 있어. 절대 저 아저씨랑 엮이면 안돼.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담긴 가방을 꼭 끌어안는다.

한참을 돌이 되어 앞만 봤다. 얼마나 긴장했길래 눈알에 물기가 하나도 없다. 새벽 4시반, 백발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뮌헨 중앙역을 탈출한다. 아저씨, 오해해서 미안해요. 근데 아저씨, 좀 무서워요.

네시간 반동안의 뮌헨 노숙 체험에서 아저씨의 혼잣말보다 날 떨게 한 게 있었다. 나의 '여자'라는 생각, 나의 '동양인'이라는 생각, 나의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라는 생각이다.


미래에 대비하는 것과 미래에 불안해하는 건 확연히 다르다. 나는 확실하게 후자였다. 눈알이 뻑뻑해지도록 불안해했다. 그러고보니 나 이제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최선을 다하기도 전에 먼저 실패를 생각했던 것 같다.

긴장이 풀리니 잠이 스르르 온다. 이러다 나를 구하러 온 첫차님 놓치겠다. 5시가 되니 저기 스타벅스 직원이 매장 오픈 준비 중이다. 여기, 제 정신줄 잡아줄 라떼 한잔 주세요.

아이폰, 아이패드. 넌 내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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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슈타트, 이 구역 존예보스는 너다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the last station of this train...


누군가 나를 향해 다정히 웃고 있다. 누구시죠. 손님, 내리세요. 잠시만요,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죠. 눈만 일어나고 다른 세포들은 여전히 자는 중이다. 일어나, 뇌세포. 일어나, 운동신경.

비몽사몽인 나와 다르게 오스트리아는 말똥말똥한 아침이다. 아, 맞다. 오스트리아구나. 국가 자체가 생소해서 기대 많이 했는데 이런 처참한 꼴로 만나네. 이건 비밀인데 나 어렸을 땐 너랑 오스트레일리아랑 헷갈렸다. 그 오.알.못이 잘츠부르크를 들어봤으니 잘츠부르크는 대단한 도시인 거 맞지. 급하게 네이버 현지투어를 검색한다.

'할슈타트 당일치기'가 많네. 내 첫 여행 친구 올리비아가 할슈타트는 꼭 가보랬다. 어쩔까, 잘츠부르크 시내만 돌기도 빠듯한 시간인데. 기차값이랑 배값도 좀 드네. 그때 갑자기 오스트리아는 왠지 이 생애 다시 못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로 결정했다, 할슈타트.

버스를 타고 울프강 호수를 지나 기차로 바꿔탔다. 할슈타트 역에서 내리자마자 산에 둘러쌓인 크고 넓은 호수가 승객들을 맞이한다. 저기 멀리 알록달록한게 있는데. 어머, 저거 집이구나.

누가 이런 곳에 집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호수를 넘어가려는 이 기나긴 줄을 기다릴 바에 걸어갈까. 편도 1시간 46분을 아침부터 걷는 건 아무래도 좀. 배는 왕복 6유로네, 그냥 타자. 그러는 사이 배가 떠나버렸다. 근데 망설이길 잘했다. 할슈타트와 1:1 독대다. 그제서야 마음 편히 인사한다. 너가 그렇게 예쁘다는 할슈타트구나. 얼마 지나 배가 돌아왔다. 배에도 나 혼자다. 아싸, 사진각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더니, 개꿀.

안뇽, 할슈타트. 난 임한결이라고 해!


할슈타트가 가까워질수록, 여기가 유명한 이유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리는 꾸밈없이 나무 색 그대로 놔둔 채 몸에만 알록달록 옷을 걸친 예쁜 건물들을 호수가 그대로 데칼코마니해놨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이었다. 친구가 신혼여행지를 고민한다면 할슈타트, 너를 추천하겠어.

그래, 존예보스 ㅇㅈ


호수 옆을 따라, 이 예쁜 건물들을 지나치며, 이 띵작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놓고 즐겨본다. 여기도 저기도 사진을 남기고 싶지만 셀카봉과 아이폰이 힘없이 저 인간 무리에 쓸려갈 것 같아 조심스럽다.

목조 건물이 내 최애 파스텔 건물을 뛰어넘었다


선착장에서 조금 걸으면 유럽 최초의 소금광산이 있다. 예쁜 핑크빛 조각들이 뭔가 했더니 소금이었다. 순대에 나오는 소금만 분홍색인게 아니었다.

소금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으로만 봐도 짜다


예쁜 것도 수면후경이라고 뮌헨역 노숙의 여파가 몰려온다. 나가는 배가 1시간 후에나 온단다. 예쁜 카페에서 초코케이크 하나 순삭하고 사과폰과 사과패드가 든 가방을 소중히 안은 채로 잠에 든다.

할슈타트의 흔한, 예쁘지만 매우 비싼 카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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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잘츠부르크의 비에 젖은 빵


잠에 의식을 잃고 나가려던 배 시간을 놓쳤다. 그 다음 배로 할슈타트를 빽빽히 메운 인간 무리에서 탈출한다. 어째어째 흘러 오니 비몽사몽했었던 잘츠부르크역이다. 너는 벌써 노을 져 가는데 나는 아직도 비몽사몽이다.

잘츠부르크역 대형마트 SPAR에서 가장 싼 빵과 가장 싼 과일을 얻었다. 오늘 하루종일 먹은거라곤 카페라떼 1잔, 초코케이크 1개, 생크림빵 1개뿐이다(칼로리 때문에 적어보이진 않는다). 목이 말라서 12개에 0.96유로(한화 1300원)짜리 천도복숭아 5개를 뜯자마자 연속으로 넣는다. 자, 배도 채웠으니 이제 잘츠부르크 시내 미션을 클리어할 때야.

1탄은 미라벨 궁전과 미라벨 정원. 하도 예뻐서 '아름답다'라는 뜻인 미라벨이 이름에 붙었다고 한다. 정원은 예쁜데 궁전은 잘 모르겠다고 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몇 주째 등에 모시고 다닌 우산을 드디어 쓸 때가 왔군, 하하.

미라벨 궁전, 미라벨 정원, 그리고 정신 혼미한 사람


2탄은 모차르트 생가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 죽는다는 건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이상 못 듣는 걸 의미한다고. 나에게 죽는다는 건 뭘 의미할까. 더 이상 너의 그 예쁜 두 눈을 보지 못한다는 걸까. 저런 오그라드는 띵언은 어떻게 하는거야.

아저씨 노래 음악시간에 배웠어요


3탄은 호엔잘츠부르크성. 야경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왜 아무도 없지. 비가 오기 때문이지. 비에 젖은 신발이, 가방이 무겁다. 그리고 여기 꽤 가파르다. 하루 2만 보로 2주만에 맨들맨들해진 슬립온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어, 마지막 3탄에서 빨간 불. 피가 얼마 안 남았다. 이런 캐릭이 아닌데 오늘 유난히 약하다.

3탄 호엔잘츠부르크성, 저 기울기가 쉬운 퀘스트는 아님.


나는 내 체력을 과신한다. 체력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둔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체력이 후순위인 거다. 이번에도 동행을 보내고 나서 내 욕심대로 일정을 짰다. 숙소비 아낀다고 버스에서 자고, 텐트에서 자고, 결국 노숙까지 했고, 교통비 아낀다고 편도 2시간쯤은 기본으로 걸었다결국 몸살에 걸렸다.


비가 내리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추웠다. 나만 그런가, 추우면 더 배고프다. 아무도 없는 이 유명한 성에 비를 피해 앉아 빵을 꺼낸다. 웩. 이 빵, 신 맛이 난다. 이런 빵을 왜 파는거야. 그래도 춥고 배고프고 기댈 건 이 빵 밖에 없다. 아직 반 밖에 못 먹었는데 씹을 힘이 없다. 빗물이 튄 손으로 잡은 부분이 축축하다. 아, 비 젖은 빵도 눈물 젖은 빵 못지 않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

비에 젖은 빵, 이정도면 하드코어 ㅇㅈ?


빵과 복숭아 포션으로 피를 채우고 다시 3탄 호엔잘츠부르크성 전망대에 도전한다. 아, 오길 잘했다. 예쁘다.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 내리는 마을도 예쁘네. 흑백사진이 예쁜 것처럼 차분한 느낌. 이 오들오들한 떨림은 잘츠부르크 전망에서 오는 전율이 아니라 전신의 핏줄에서 오는 미열 때문이겠지. 그래서 이 전망이 더 감동적이다. 그리고 난 지금부터 정류장까지 1시간 반을 더 걸어야 한다.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내려다 본 잘츠부르크, 몸살이 아깝지 않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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