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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결 Jun 01. 2023

[난생처음 시리즈] 차 마시는 삶

#홍차 #우롱차 #보이차 #허브차 #티블랜딩 #취향 #취미 #명상


어릴 적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소녀(혹은 소년)이었는지, 나의 일상을 떠올려보자.

나는 '주변 친구들과 어울려, 쉬지 않고 재잘대던 모습'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산이나 공원이나 궁을 좋아했고, 그럴 때면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찾아서 혼자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바람을 느끼길 좋아하기도 했다.

불현듯 '나도 꽤나 사색적인 소녀였나'하는 생각이 드네. 후훗.


그때는 내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던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하고 나면 행복해지는 그 일들은 엄마한테 혼나면서도, 학교를 땡땡이치면서도, 시간을 내어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내 취향이라고, 내 취미라고 말하는 일이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이야기는 진짜 취향, 진짜 취미를 알아챈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차 마시는 삶'이 분명 나를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확신. 그것이 생기게 된 경험이다.




#푸껫 #더크레스트리조트 #모닝티 #다즐링 #트와이닝

처음 '차 공부 중'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건, 일종의 '백수의 허세'라고 줄여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방송작가를 하며, 프로그램을 이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시즌제 프로그램 하나만 해도, 뭔가 나를 훑어내어 가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돈벌이에 게으른 내 성향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평균 두 달 정도는 쉬었다. (물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도,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불안한 하이에나 시절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 에는, 뭔가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것들을 했다. 남들이 하는 여행, 독서, 운동이나 다이어트도 있었지만, 그 항목들을 열거하여 살펴보면, "왜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거지?" 하며, 쓸데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시기를 막론하고 '일종의 새 진로 탐색' 같은 느낌을 주는 일들이 많았다. ([난생처음 시리즈]는 그런 나의 경험들을 갈무리하는 시리즈다.)


처음에는 "진짜 방송작가 일이 하기 싫은가? 그래서 다른 진로를 찾고 싶나?" 하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논다는 말보다, "새로운 걸 배운다."라고 말하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 같았다. 그 말엔 거의 대부분 "넌 참 좋아하는 것도 많고, 부지런하다."라고 칭찬이 돌아오니까.

 

#큐앤리브즈 #티테이스팅 자격증 딸 때 생각이 나던 풍경

<티블랜딩 자격증>이란 걸 공부하기 시작한 건, 사실 수년 전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딸 때의 계기와 비슷했다.

원예학과를 졸업했으나, 내 삶에 그 비싼 등록금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게 좀 슬펐다. 전화번호부 두께의 원서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 지금은 읽지도 못하는 장식품이다. 식물을 배웠고, 식물을 좋아하지만, 가까이 두기엔 내 라이프 스타일과 전혀 맞지 않았다.


좋아하는 식물과 멀어진 것에 대한 변명을 잠깐 하고 넘어가자.

방송일은 여유가 참 없다. 매주 레귤러리 하게 한편씩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니, 빡빡하게 매일의 스케줄이 차 있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밤새 도돌이표 회의를 하기 일쑤, 점심-저녁은 늘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었고, 회의가 막차 전에 끝나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여러 장르의 방송을 해서 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방송은 내가 아는 것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새로운 아이템을 찾으며 공부하고, 기존에 이미 있던 것들을 수집하여 공부하고, 그 공부 속에서 아주 쬐끔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일이란 생각이다. 그러니, 나는 잘 모르는 것들을, 잘 못하는 것들을 채우기에 급급한 하루하루였다.


확실하게 식물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삶이다. 살아있는 것을 키우고 살피기는커녕, 돌아보기도 어렵고, 봐도 감흥 없이 지나치기 일쑤인 삶.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다시 '차'를 공부하게 된 계기로 돌아가야겠다.

물론 차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인들은 참 많다. 궁금할 때 검색해서 봐도 된다. 그러면, 애호하는 아마추어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애호가 되기가 힘들다. 알아야 좋아질지 말지를 알지 않겠는가. 그리고 뭐든 공부를 하면 남겠지, 내가 지금보다 뭐든 더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좋았다. 매번 찾아보아야 알던 정보를, 두 번에 한 번 정도로만 줄어도 스스로 뿌듯해할 테니까.

나는 티연구원에서 하는 과정을 등록했다. 그리고 두 달 남짓한 과정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자격시험을 봤다. 그리고 잊었다. 내 생에 '차'는 그렇게 슬쩍 머물다가, 곧 잊혔다.


"배워 아는 건 진짜일까. 겪어 남는 것과 같을 수 있을까"


이렇게 내 생을 스치듯 지나가는(자격증을 남기고) 배움이 또 하나 생겼다. 나는 왜 배우는 것에만 집착할까.

자격증을 딴다-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본다- 같은 목표를 가지면 타발적 동력이 생기는 것. 외부에서 내 등을 떠밀어 주고, 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하고 보니, 나는 꽤나 범생적이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 후훗.


나는 30대 초반 카페를 했었다. 그때는 장사를 하기 위해서 원두의 원산지와 종류, 로스팅법, 그라인딩, 에스프레소 머신종류와 프레스방법 같은 것들을 공부했다. 실전이었고,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카페는 곧 망했다ㅋ) 신기한 건 난 지금도 커피의 맛과 향의 차이를 알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찾아내는 능력정도는 남아있다.


반대로 티블랜딩 자격증을 위해 공부한 나라별 홍차의 종류나 그 맛과 향의 차이는 변별이 어렵다. 휘발됐다.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한 부케나 동서양꽃꽂이를 하던 손의 감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물론, 아예 무지한 사람들보다는 아는 게 조금 더 있을 수 있지만, 그걸 '하고 싶긴 했었는지' 의구심이 들만큼,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남들에게 "나 이거 할 줄 알아. 자격증을 봐."라고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진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며 걱정이 앞선다.


생각해 보면, 운동하자! 결심하고 운동복부터 쇼핑하거나, 다이어트시작! 결심하고, 보조제부터 사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겠다.

소비=경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처럼, 공부에 시간을 쓰는 소비를 선택하고, 다했다! 뿌듯하네! 하고 기억 속에서 치워 버리는 건 아닐까. 무엇을 남기는지 갈무리하지 않고 넘긴 것들. 그렇게 남은 기억은 죽은 것이다.

'박제'된 기억엔 금세 먼지가 쌓인다.


그 시절 내가 등록을 하고,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는 행위를 했던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조급함으로 시간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는 안도, 나의 호기심이 아직 살아있다는 안위. 어떤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갈무리하지 않고 채우기만 한 시간들.


#미나미양장점의비밀 중에서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위에 캡처한 영화를 볼 때였다. 영화에서 지나가는 아주 짧은 장면인데, 내게는 큰 인상이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자격증을 딴지 거의 4년 만에 차기와 홍차를 꺼내 차를 내려 마셨다. 홍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산이 보였고, 하늘이 보였고, 볼에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나에게 '차'가 계속 이렇게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솟구쳤다. 그러려면, 지속적인 만남의 시간이 필요하겠네-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행 때마다 그 나라 홍차(혹은 다른 종류의 차)를 한 두 캔 사 모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것들을 꺼내서, 해 질 녘 노을과 함께 마셨다.


그 시간에 퍼지는 차 향을 맡으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에게 '차'는 숲에 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자연이구나-

커피는 수다 도중에 쭈욱~ 들이켜기도 하지만, 차는 대화 도중에도 그 말을 멈추게 하고, 시간의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 쉼표 혹은 숨표 가 되어, 지금의 나를 느끼게 해 준다. 맛과 향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숨이 꼭 필요하고, 차를 마시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걸 찾는다.그리고 그 행위는 시간에 어떤 표식으로 남는다. 그날을 기억하게 한다.


앞으로도 나는 어떠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배움'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이제는, 그것을 진짜 좋아하는지도 끊임없이 자문할 것이고, 내가 그걸 자발적으로 하는 자, 얼마나 하는지, 하는 동안 즐기고 있는지도 살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오래오래 즐기면서, 스스로 터득하면서 이어갈 것들을 하나씩 늘려보려 한다.


그렇게 될 때, '난생처음'하는 경험들이 나에게 취향과 취미로 남으며, 박재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족적을 남겨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나를 조금 더 알게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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