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by 서한겸

MY NAME IS LUCY BARTON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7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많이 좋아했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찾아 봤다. 좋았다.

작중 주인공이 아주 가난하게 자랐다는 점에 깊이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가난하게 자라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자신보다 좋은 환경 출신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거리감에도. 대중문화를 잘 모르고, 옷차림에 신경을 쓸 줄 모르고, '출신이랄 게 없다'는 식으로 무시받고도 타격조차 입지 않는 점에도.


9쪽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53쪽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60쪽

그 순간 또다시 엄마의 말이 조금 쏟아지는 듯하더니 엄마 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엄마는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내 쪽잠을 잤었다는 이야기를.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런 버릇이 생겨." 엄마가 말했다. "쪽잠은 언제든 앉은 채로 잘 수 있으니까."


63쪽

"더 듣고 싶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엄마의 달라진, 서두르는 목소리를.


79쪽

잠시 뒤에 엄마가 말했다. "너희가 자랄 때 돈이 너무 없었던 거, 미안하다. 그게 창피한 일이었다는 건 나도 알아."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중요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내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잘살잖아요."

"글쎄다." 엄마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89쪽

종종 그러듯 나는 미리부터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96쪽

그는 눈을 감은 엄마의 모습을 보자,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는 병실 안에 들어온 채 그대로 서 있었고, 그와 나 둘 다 엄마가 정말로 잠들었는지, 아니면 다시 눈을 뜰지 잠시 지켜보았다. 우리 둘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 순간,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시내로 나가면, 이따금 나는 낯선 사람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제발요. 저 좀 저기서 빼내주세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어떤 낯선 이도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그런 엄두는 내지 않을 것임을, 결국 그런 배신행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27쪽

나는 문득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텅 빈 복도를 걸어갈 때 메릴린이 내게 웃어줬던 게 생생히 떠올랐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착한 미소였지만, 메릴린은 그 미소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향한 것처럼 여겨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메릴린을 잊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37쪽

나는 비키와 함께 들판으로 나가, 날이 저물고 우리집보다 어둠이 더 무서워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171쪽

이유는 몰랐지만 나는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누구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190쪽

처음에 아빠는 쑥스러워하느라 나를 끌어안지도 못해서 내가 아빠를 끌어앉았다. 그리고 내 머리 뒤쪽에 닿는 아빠의 따뜻한 손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아빠가 내 머리 뒤쪽을 잡는 일은 없었고, 내 안-깊고 깊은-의 뭔가는 갔어, 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194쪽

나는 정말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두려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바턴 집안의 식구들, 우리 다섯 명-줄곧 그랬든 정상적이지 않은-이 하나의 구조물로 내 머리 위에 떠 있고, 심지어 다 끝날 때까지 나는 그것이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오빠와 언니가 어땠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던 당혹감이 자꾸 생각났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그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198쪽

나는 그렇게 거의 가진 것 없이 자랐기 때문에-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것뿐이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또다른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원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고-단연코 관심이 없었고-게다가 마침 운이 좋아 내가 쓴 글로 돈을 벌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엄마가 엘비스나 미시시피 메리에게 돈이 득이 되지 않았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결혼생활에서, 인생에서 돈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돈이 곧 힘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건, 돈은 곧 힘이다.


204쪽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 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내가 오빠나 언니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 네 인생을 봐. 너는 묵묵히 네 길을 가서...... 원하는 걸 이뤘잖아." 그 말은 아마 내가 이미 냉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말은 아마 진심이었겠지만, 엄마가 진짜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217쪽

내가 내 아이들이 느끼는 상처를 아느냐고? 나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옮긴이의 말)

227쪽

물어보지 않아 서운해하면서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친절하게 느끼는 상태 ... 개방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태(모든 자기 노출의 글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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