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2.
19쪽
그가 커피잔 받침에 놓인 스푼을 바로잡아놓고 말하길, 그래야 하면, 한밤중에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지만, 꼭 그래야 하면 내게 전화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받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커피잔 받침에 놓인 스푼을 바로잡아놓고... 이런 부분이 좋다. 진짜같고, 디테일같고, 시간이 개입될 수 있고.
22쪽
그때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나면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두려워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나중에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들이 우리 옆을 쌩쌩 달려가는 아우토반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쪽
나는 왜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그건 내가 결코 몰랐기 때문일 테고, 윌리엄 역시 전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25쪽
나는 지독히 암울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나는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사실이 그렇다.
28쪽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겁을 많이 먹는다고. 분명 어린 시절에 내게 일어난 일 때문이겠지만, 나는 걸핏하면 몹시 겁에 질린다. 한 예로, 거의 매일 저녁 해가 지면 나는 여전히 무섭다. 아니면 이따금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처음 윌리엄을 만났을 대는 나 자신의 이런 면을 알지 못했고, 그 모든 게...... 오,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윌리엄과의 결혼생활을 끝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어느 정신과의사를 찾아갔고, 그 다정한 여인은 내가 처음 찾아간 그날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내가 답하자 그녀는 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올리며 내 문제에 해당하는 진단명을 말했다. "루시, 당신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완전히 진행된 경우로군요." 어느 면에서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뭔가에 이름을 붙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38쪽
윌리엄이 내게 에스텔은 결코 우울감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그의 비열한 면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생활 동안 내가 더러 우울감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음, 에스텔이 결코 우울감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44쪽
마음속에서 뭔가가 작게 핑 하고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걸 그 순간까지 잊고 있었다.
53쪽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걸 잊을 수가 없었다.
54쪽
나는 그녀가 사회 계급에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의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밑바닥 출신이고, 그렇게 태어나면 그 사실은 절대 당신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정말로 그것을, 내 출신을, 가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 같다.
하지만 내가 처음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하면서 조용히 내 팔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쪽이 루시. 루시는 출신이랄 게 없어."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낸 책에서 썼다.
74쪽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윌리엄이 행복을 덜 느끼게 되고 작은 일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은 덮어둔 채 우리의 삶을 살았다.
79쪽
그녀는 남편의 누이가 집에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달아났다. 자기가 떠난 것을 깨달았을 때 감자 농부인 남편이 집에 혼자 있기를 바라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서 늘 놀랐다.
97쪽
그리고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윌리엄에 대해. 이유는 모르지만 그 순간 깨달았고, 우리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나는 윌리엄을 쳐다보았다. 그가 내 표정에서 내가 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손님들이 떠나고 딸들이 잠자리에 들기를 기다렸고, 내가 아까 그 여자가 한 이야기를 전하자 잠시 후 그가 고백했다.
100쪽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둘 다, 자라면서 바깥세사의 문화를 접하지 못했다.
=>결핍으로 이어지는 사이가 많은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점을 이해받았을 때의 해방감과 안도감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결핍만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많다.
113쪽
어떻게 다들 뭘 하면 되는지 알고 있는 거지? 나는-앞서 말했듯-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그 상황에서는 투명인간이라는 느낌과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이 젊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쓰인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것 같은 아주 기묘한 감각을 경험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윌리엄과 그의 어머니는 라운지체어를 이어붙여놓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거기 앉았고, 그러고 나서야 윌리엄은 고개를 돌려 내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오라고 팔을 흔들었다. "루시," 캐서린이 말했다. "무슨 문제 있니?" 그녀는 챙이 넓은 캔버스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선글라스가 나를 향했다. 나는 대답했다.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러고는 곧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우리 방으로 갔고-하지만 길을 잃고 한동안 우리 층의 엉뚱한 구역을 헤맸다-방안으로 들어가서 울고 또 울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 같지는 않다.
122쪽
사람들은 어떤 상실을 경험하면 이따금 무의식적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윌리엄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돈을 받았지만, 상실감은 계속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윌리엄이 뭔가 받을 빚이 있다고 느꼈다고-지금도 느낀다고-생각한다.
173쪽
최근에, 다시 뉴욕에서, 하시드파 유대교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는데-내가 이걸 본 건 죽은 남편 때문이었다-중간쯤 보다 멈추어야 했다. 그걸 보니 나 자신이 너무 많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떠나온 세상 때문이 아니라-그 세상은 내게 전혀 익숙지 않았다-일단 떠난 뒤에 그들이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중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데이비드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떠났을 때 그랬으며,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렇다. 이런 박탈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저 아이들에겐 기회가 없다는 점이야." 내가 방금 지나쳐 간 집을 손으로 휙 가리키며 말했다.
188쪽
나는 내 어둑한 호텔방 의자에 돌처럼 가만히 앉아 그 일을 생각했다. 크리시가 그만큼 아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처음으로 이해했던-마음속에서 조금도 축소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이다-것 같다.
211쪽
몇 분 더 운전하다가 윌리엄이 말했다. "루시,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어."
"그냥 계속 가." 내가 말했다. "로이스 부바의 집을 지나가면 어딘가 차를 세우고 생각해보자."
214쪽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221쪽
로이스를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내면에-거의 밑바닥에-깊은 편안함 같은 게 자리하고 있는 듯했고, 내 생각에 그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236쪽
돌아보는데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 대화가 그녀에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나는 미안했다.
243쪽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간 알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249쪽
그리고 윌리엄이 닫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이상하게도-거의 그대로 있는데 배경의 모든 것이 물러나는 듯했다. 그가 멀어져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는 말이다.
254쪽
공항 창가에서 나는 아주 넓은 주차장을 돌고 있는 윌리엄을 보았다. 그는 내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만큼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고 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자꾸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공간과 시간과 공허
255쪽
그의 한쪽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그가 마침내 나를 완전히 쳐다보았을 때 또 한 방울이 반대쪽 눈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어저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했고-누가 위로를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내 위로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탑승교에서 가방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는데, 더이상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윌리엄은 우리가 뱅고어의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가는 길부터 점점 사라지다가, 그 순간엔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가방을 끌고 택시 승차장으로 갔고, 윌리엄은 나보다 먼저 택시를 타며 말했다. "고마워, 루시. 곧 연락할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 곧 연락하지 않았다.
256쪽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그날 저녁 택시 뒷좌석에서-문득 우리가 신혼 시절 빌리지의 아파트에 살 때 내가 끔찍한 기분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내 부모님에 관한, 그리고 내가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그건 사실이었다-에 대한 감정이었고, 나는 종종 우리의 작은 침실에 앉아 가슴속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울었다. 그러면 윌리엄이 다가와 말했다. "루시, 말해봐. 무슨 일이야?" 그러면 나는 그가 갈 때까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에게 나를 위로한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
265쪽
하지만 내가 낳은 아이들이, 그들의 성장 환경이 벌썩-한 세대 만에-나하고는 너무나,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캐서린이 살아 있다면 지금 몇 살일지 문득 생각해보았다. 그렇게나 늙은 그녀를 떠올리니 마음속에서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주 슬퍼졌는데, 우리 아이들의 아주 늙은 모습을 상상할 때 느껴지는 슬픔과 비슷했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던 얼굴이 종잇장처럼 파리하게 변하고 팔다리는 뻣뻣해져 그들의 시간이 끝난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는 그 곁에 없어서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는 생각-(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
269쪽
"그렇군요. 그럼......" 그녀는 할말을 잃은 것 같았고, 나는 난처해하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274쪽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내 사랑스러운 정신과의사가 놀란 것처럼. 그녀는 말했다. "당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루시, 많은 사람이 시도조차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윌리엄이 기쁨이라고 부른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기쁨이었다.
이유야 누가 알겠는가?
279쪽
캐서린, 당신은 해냈군요, 용케 해냈어요, 우리 세상을 나누고 있는 그 경계를 넘어갔어요! 나는 그녀가 어느 면에서는 정말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골프를 치고. 케이맨제도에 놀러가고.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법을 알고, 나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가 자란 환경의 희미한 냄새를 풍기는가?
280쪽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여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293쪽밤마다 나는 뮤지엄 타워의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고 밤새 거기서 일하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금요일이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밤에 그 불빛을 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은 늘 켜져 있었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내가 지켜본 그 시간 동안, 자정을 지나 새벽 세시가 될 때까지, 햇빛이 충분히 밝아져서 전등이 여전히 켜져 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거기서 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내가 어떤 신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에 그 타워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남편을 떠나고 몹시 겁에 질려 있었을 때, 나를 사랑하지만 늘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잠든 남자 옆에 누워 불빛을 바라보면서 내 삶의 아주아주 많은 밤에 받았던 그 위로를, 나는 결코-기억에서-지우지 않았다. 타워의 불빛이 내가 그 시기를 통과하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