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와 시간약속

by 서한겸

친구가 서울대 교수가 됐다. 정말 기쁘다. 이 친구도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먹고 있는데, 나에게 약 효과 좋으니 꼭 먹어보라고 신세계라고 했다. 친구는 박사를 마치고 타 대학에 임용된 후에 진단을 받았으니 약의 힘으로 공부를 마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을 뚫고 공부를 해낸 거다. 이 병 때문에 꼭 뭘 못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의외의 계기로 남편한테 크게 혼났다. 순전히 내 잘못이므로 싸운 게 아니라 혼난 게 맞다. 얼마 전 전시 서문을 쓰기 위해 작가 작업실에 방문했는데, 오후 약속인데 내가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며 그 약속을 준비하고, 무척 보수적으로 시간계산을 해서 1시간이나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걸 보고 남편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고 충격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남편: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약속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수적으로 시간 계산해서 지킬 수 있는 거였냐. 그동안 같이 살면서 자잘자잘하게 시간 약속 못 지키는 거 보면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포기했는데, 그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냐.

나:그게 아니다.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약속은, 정해지는 순간부터 너무 초조하고 괴롭게 한다. 매일 그렇게 긴장하며 살 수는 없다.

남편:출근하는 모든 사회인이 그런 긴장으로 살아간다.


여기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혼자 누워서 명상을 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가상의 말싸움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시간 약속, 출퇴근 다 포기하고 산 건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 이미 남들보다 시간 약속을 덜 하고 있는데 그 조금, 몇 번도 못 지키냐'

고 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말싸움을 못하는 건 아니다. 늘 내가 상상도 못한 논리를 꺼낸다. 그리고 그것들이 또 말이 된다.

이제 난 ADHD 진단도 받았으니까... 이해해 주길 바랐는데.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사실 남편은 이미 이해해주고 있다. 다만 본인과 함께 지켜야 하는 시간 약속을 앞두고, 내가 늦어서 본인도 늦게 되는 것에 대해 크게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것 같다. 남편은 시간 약속 늦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나 때문에 여러 번 늦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체념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했다...


갑자기 확 지치고 서글퍼졌다. 이 병이 지겹고.

ADHD니까!라고 내 마음속에서는 완전히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무슨 죄람. 지금까지 많이 이해해 준 걸 감사히 여기고, 앞으로는 남편과 함께 지켜야 하는 시간 약속이라도... 꼭 지켜야겠다. 그게 힘들더라도 더 이상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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