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서의 회화

회화의 죽음 이후, 바르뜨의 '텍스트' 이론으로 본 회화의 의미-2011

by 서한겸

1.


신체에서 가장 성애erotic를 자극하는 부분은 "옷이 갈라져 있는 그 부분"이 아닌가? ... 심리분석이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성애적인 곳은 단속적인 것이다. 두 가지 옷(바지와 스웨터) 사이, 두 가장자리 사이(목이 파진 셔츠, 장갑과 소매)에서 번개 치듯 스쳐가며 보이는 피부의 단속성. 오히려, 우리를 능욕하고 있는 것은 이 번개처럼 스쳐 보이는 것 그 자체이다. 보이는 듯하다가 보이지 않는 그 장면.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뜨, 김명복 역,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0, 10쪽.


위 인용은 롤랑 바르뜨의 "텍스트의 즐거움"의 일부분이다. 텍스트와 에로틱함, 그리고 에로틱함과 회화가 어떤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서 바르뜨가 강조한 '갈라져 있는 그 부분'에 주목했다. 이 틈은 한 주체 안의 균열이며 자신도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언뜻 지나가거나 표출될 수 있는 기회이다. 그 틈이 회화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데 핵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회화의 붓질을 회화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틈, 글로 말하자면 행간과 같은 것으로 가정했다. 이로부터 붓질 사이에서 유추할 수 있는 심리적인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술의 죽음과 함께 회화의 죽음이 선언된 후로 수십 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회화는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죽음을 선고받은 후의 회화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의문이 이 글의 시작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요 사상가인 롤랑 바르뜨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설명할 수 있는 텍스트에 관한 이론을 펼쳤다. 이때의 저자를 모더니즘에서의 주체로 파악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체는 어떻게 변화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새로이 부각되는 독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작품과 텍스트에 관한 바르뜨의 이론을 회화에, 저자와 독자를 회화의 작가와 관객에 적용해 현재의 회화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2. 배경


회화는 어떻게 죽었나

오랜 시간 동안 시각예술은 모방을 통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사진술의 발달 등의 이유로 시각예술은 더 이상 모방할 필요도 자격도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예술이 예술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특성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은 사라졌고 아서 단토는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의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한다.* 좀 더 직접적으로 회화의 죽음은 1839년에 사진이 발명된 사실을 안 화가 폴 들라로쉬에 의해 선언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아서 단토는, 이 화가가 만약 붓질에 주목했다면 회화가 죽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을 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붓질이란 실제를 가장 가깝게 모방하기 위해 극도로 절제되고 억제되어 있던, 물감의 물질적 제스처를 의미한다. 이 붓질은 그린버그가 평면성 대신에 회화의 기준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단토는 붓질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꿰뚫어 어떤 환영을 보는 것과 붓질 그 자체, 그림 그 자체를 보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붓질, 제스처, 물감의 특성에 대해 단토나 그린버그가 어떠한 이론을 펼쳤는가는 잠시 미뤄두고 싶다. 이 붓질이란 회화가 하나의 환영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고 만들어진다는 사실의 결과이자 증거라고 생각한다. 즉 어떤 장면이 한 번에 파악되거나 떠오르는 것과 달리, 회화는 일정 시간 동안 붓질 등의 행위를 통해 순차적으로 제작된다. 아무리 매끈하게 다듬어져 붓이나 물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회화작품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의 표면, 물질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어떤 화면을 어떤 장소의 풍경으로 볼 수도 있지만 흰색과 녹색, 검정 색조의 물감이 섞여 발라진 위에 나무 모양으로 발라진 갈색조의 물감...과 같이 해체할 수도 있다. 회화가 이런 식으로 이해될 때 작가와 관객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붓질들이 보여주는, 붓질과 다음 붓질 사이의 틈과 그 틈에서 작가 안의 변화와 다양한 성격을 유추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틈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재해석하고 작품의 새로운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줄 것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2004, 12-13쪽.

**아서 단토, 같은 책, 158-160쪽.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의 주체

다른 많은 포스트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맥락에서의 주체는 보편타당한 현실 인식체계를 주장했고 하나의 기준에 따른 전체성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과 전체성을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이 배체, 억압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된 특징은 데카르트 이래 모더니즘에서 확고한 기준으로서 믿어 왔던 주체와, 이 주체가 주장하는 보편 타당성에 대한 회의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억압된 것들의 복귀로 설명하는 것도 이외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이때 억압된 것은 주체 외부의 객체만이 아니다. 주체/객체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도 엄격하게 나뉘었는데, 주체로서 기능하는 한 인간도 그 자신 안의 감성을 억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인간 안의 감성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나누어 그 반을 다른 대상에, 다른 반만을 자신에게 투사한 모더니즘의 주체는 그 시작부터 불완전한 것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주체는 이미 객체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이 주체는 자신 안의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 즉 감성을 부정하고 다른 대상에 떠넘기는 대신 자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모든 인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서양 사상사에서 언어와 이성을 통한 설명과 이해, 정의, 분석이 주를 이루었다고 본다면 이는 인간 이성, 또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제 주체는 확고부동의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더 이상 주체와 객체로 나뉘지 않는 모든 인간이, 즉 모든 주체가 이러하다면 인간의 활동과 그 결과물, 그들 간의 상호작용 또한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롤랑 바르뜨의 이론에서 저자와 독자는 모두 자신의 의미 체계를 구성하는 주체이다. 저자는 자신의 통제와, 그리고 통제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부분 둘 모두를 통해 작업한다. 저자는 가려져 있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 스스로도 감동받는다. 독자는 작업에 드러난 그 틈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진우, 현대의 종말과 세기 전환기의 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현암사, 1997, 219쪽.




3. 저자의 죽음과 새로 짜인 텍스트로서의 회화


저자의 죽음과 재탄생

'저자의 죽음'에서 바르뜨는 글쓰기라는 행위 안에서 저자, 주체와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글쓰기라는 행위만이 남고 누가 쓰는가, 누가 말하는가 등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따라서 저자(실제로 글을 쓰고 있는 한 인간)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보는 독자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변화한다. 모든 독자는 읽는 동시에 자신만의 글을 새로 쓴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어떤 저자가 '죽은' 것인가? '죽은 저자'는 한 글이나 책의 전제가 되는 저자, 바르뜨의 말을 빌자면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앞서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 이전에 선행하는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저자는 죽고 작품은 해체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해체가 작품에 대한 난도질이나 작품의 무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은 더 이상 저자의 일부분 또는 소유물로서의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고 완전히 유동적인 하나의 구조물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이 작품은 어떠한 것이며, 이러이러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보는 관객 또한 '그 작품은 나에게는 다른 어떠한 것이며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하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재탄생은 저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에 의해서 그 작품이 다시 읽히는 순간마다 일어난다. 저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신의 틈을 받아들이는 저자, 자신이 쓰거나 만든 것에 대해 관객 또한 될 수 있는 저자로. 이러한 설명은 외부적 표현 방식(언어/회화재료, 기법 등)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는 모든 예술행위의 본질적인 성격을 전제로 한다. 저자든 독자든 어떠한 언어 체계나 표현 체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표현에 대해 저마다 다른 경험과 맥락, 인용구들을 가진다. 예를 들어 어떤 글에 등장한 '고통'이라는 단어에 대해 한 사람은 온몸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다른 사람은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정도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흐가 그린 밤하늘을 보며 이브 클랭의 푸른빛과의 연관성을 생각할 수도 있고, 빛이 들지 않는 심해의 색을 떠올릴 수도 있다. 애초에 어떤 감각과 어떤 물질이 동일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마음속에 떠오른 붉은빛과 똑같은 붉은 안료나 물감은 있을 수 없다. 내적인 감각, 심상, 표상을 그와 어느 정도 관련됐을 뿐 결코 같을 수는 없는 외부의 무언가로 표현해야 할 때 이러한 간극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작품의 고정된 의미는 독자뿐 아니라 저자 자신도 경직시킨다. 자신이 사용한 단어의,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거나 또는 전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맥락들을 인정할 때 저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자신의 글과 단어들의 수많은 연결고리와 맥락들 사이의 틈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틈과 그로부터 드러나는 몰랐던 것들을 발견할 때 글쓰기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고 바르뜨는 설명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가'이다.


*더 자세히는 '텍스트의 즐거움' 참조. 이 책 전체에 걸쳐 바르뜨는 글쓰기의 즐거움과 환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즐거움과 환희라는 단어는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하는데, 즐거움은 문화적인 것, 이성적인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가까우며 환희는 우리가 몰랐던 것, 감춰진 것, 관능성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깝다.


작품에서 텍스트로

모든 것은 외부의 어휘로 번역될 수 있을 뿐인데, 이 간극을 인정하는 것이 작품을 텍스트로서 재탄생시킨다. 바르뜨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텍스트는 방법론적인 영역이며, 언어와 담론의 '움직인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완성되어 세상에 내보내진 작품을,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가진 맥락들을 인정하며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뻗어나갈 여지가 있는 구조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바르뜨는 텍스트text와 텍스쳐texture의 어의적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이 텍스트가 그 최고의 가치를 발하는 시점을 바르뜨는 텍스트가 주는 환희로 표현한다. 텍스트는 합리성이나 언어적 규칙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것을 넘나든다. 내적인 것의 외부적 번역이라는, 즉 결코 완벽한 번역어는 찾을 수 없다는 숙명이 오히려 자유를 주고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이로부터 단어와 표현들은 더 자유롭게 서로 엮이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체는 자신의 알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한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는 대신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텍스트를 직조한다. 이 과정에서 언뜻 드러나는 자신의 감춰졌던 면, 이것이 텍스트가 주는 환희이다.


텍스트로서의 회화

이러한 맥락에서 회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바르뜨의 저자와 독자를 회화의 작가와 관객에 대응시켜 본다면, 작가는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 바르뜨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이룩된다'고 말하지만 저자 또한 독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 안의, 스스로 통제할 수 없거나 알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자신의 글의 행간과 틈, 어휘들의 밝혀지지 않은 인용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붓질과 제스처들이 회화의 틈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들은 작가의 흔적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통제에 온전히 따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틈에 주목해 회화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마치 정신분석에서 말실수나 무심결의 습관과 같은 작은 단서들을 통해 의식을 파악하려 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작가가 무아지경에 이르러, 또는 우연에 기대어 작업하는 경우에는 물론 붓질은 작가의 이성적 제어를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떠오른 표현이나 내적 심상과, 붓과 물감과 기름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적 덩어리들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작가의 작품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회화의 화면 위에 그 흔적을 남기는 제작 과정들은 작가의 의도와 무의식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장이 된다. 그리고 실은 이때 떠오르는 암시와 심상은 작가의 의도에 대한 파악이라기보다는 보는 이 자신의 의식을 비춰주는 것에 가깝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작으로서 세상에 내놓을 때 그는 그 작품의 의미에 대해 하나의 또는 몇 가지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 작업으로부터 무엇을 보고 어떤 의미를 찾아낼 것인지는 이미 작가의 영역을 떠난 문제이다. 바르뜨는 작품(텍스트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에 대해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작품은 저자와의 일치를 전제로 하며, 저자는 작품의 아버지이자 소유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말 그대로만을 보자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저자가 언어로 이루어진, 또는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작품과 일치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처음 마음속에 가졌던 이미지가, 나무틀에 짜인 캔버스 위에 덧발라진 각종 재료들의 조합과 말 그대로 동일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작품과 저자와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과 저자가 작품의 '아버지임'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의미가 된다. 비유 그대로를 살려 보자면, 부모는 자신의 유전형질을 물려주면서도 자식에게서 어떤 특성이 발현될지는 알 수 없다. 한 점의 회화는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가 지어준 이름을 가진다. 하지만 관객과 만나 어떠한 상호작용을 일으킬지, 관객이 그로부터 무엇을 느끼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해 작가는 관여할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낳기는 하나 자식은 엄연히 별개의 인간임과 마찬가지로, 회화 작업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자신만의 능동적인 삶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를 부모로 비유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이 아닌 텍스트의 설명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또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회화에 대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보는 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이 보는 이에는 작가 자신도 포함된다. 붓질 등을 통해 드러나는 회화의 틈에 주목하게 되면, 작가의 의도가 확실하고 완성상태에 대한 확실한 도안이 있는 그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화면을 통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정 시간 동안 제작된다는 천성 때문에 회화의 작가의 의도 밖의 다른 의미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어떠한 확실한 의도나 내용, 객관적인 장면 등은 포스터와 사진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회화를 통해 표현되었다면 물감층의 사이를 보고 화면 위에서의 시간과, 작가와 관객의 심리적 기제를 찾게 된다. 회화작품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캔버스가 짜이고 물감이 올려지는 과정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추상표현주의에서와 같은 작가의 신화적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과 틈새에서 관객이 무엇을 보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회화에 대해 관객들은 작가의 아우라나 명성에 짓눌리기보다는 자신의 맥락과 어휘에 따라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오히려 관객들은 이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여기 귀를 묘사한 부분의 붓질은 다른 곳의 표현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이 귀를 보고 나는 뭐가 생각나지? 아니면 작가가 귀를 그릴 때 조금 더 다른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작가는 자신이 귀를 그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작가는 자신의 회화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 회화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작가는 '그래도 도저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전혀 그런 것을 생각한 적도 없고 의도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 또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것을 떠올린다. 당신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화면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무엇이 나을지 모르는 열려 있는 장과 같다. 이렇게 나는 더 다양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는 회화를 지향한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어떤 예술작품 자체가 텍스트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해체와 재해석, 재구성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만 작품은 텍스트로서 기능한다. 이 재해석과 재구성은 작가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작가와 관객을 물론 모든 주체에게서 매번 새로울 수 있다. 이때 작가도, 회화도 더 이상 죽을 필요는 없다. 고정된 의미를 고집하기를 놓고 이미 보여진 것 이상의 의미, 또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연관성과 맥락을 통해 재해석되는 순간마다 회화는 되살아난다.


*윤난지, 위의 책, 40쪽.



참고 문헌

롤랑 바르뜨, 김명복 역, 텍스트의 즐거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0.

아서 단토, 이성훈, 김광우 역,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문화, 2004.

윤난지 엮음,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눈빛, 2004.

이진우, 현대의 종말과 세기 전환기의 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현암사, 1997.

김인식, 바르트의 후기 기호학, 한국 기호학회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