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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Apr 16. 2023

4월 16일-수륙대재

이 글은 내 평소 기준으로는 더 고쳐야 한다. 하지만 요즘 불안장애 약을 복용하고 있고 글을 마무리할 능력이 무척 흩어진 상태다. 다만 어제의 일은 가슴 아프고 인상 깊어 정리 덜 된 글을 발행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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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4월 15일의 일이다. 오늘이 되어 생각하니 무척 다르게 보인다. 4월 16일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였나 싶다.


가는 날이 이렇게까지 장날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겹벚꽃은 벚꽃이 다 지고 나서 크고 짙은 색으로 핀다. 그러면 꼭 비가 내려 겹벚꽃의 꽃잎이 떨어지는데 크고 무거운 꽃송이가 빗물에 젖어 짙은 색이 되어 바닥에 덩어리 져 있곤 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 앞에 큰 겹벚꽃나무가 있어 맑은 날이나 비 오는 날 그 꽃을 보며 중국음식과 뻬갈을 시켜 먹으며 내다보았다. 나는 겹벚꽃을 딸기콘나무라고 불렀다. 작업실에서 지하철을 타러 가던 길에도 겹벚꽃이 아주 많아 꽃이 피는 그 짧은 며칠 동안 매일 올려다보았다.


어느 절에 겹벚꽃이 많이 피었다는 소문을 듣고 당장 갔다. 입구 한참 전부터 안내하는 사람이 차가 많으니 여기에 주차하라며 멈춰 세웠다. 사람이 무척 많다 생각하며 걸어가 절 입구에 들어서는데 성장을 한 스님이 수십 명 걸어 나오며 그 뒤로 소라(나각) 바라를 든 스님, 오색 깃발을 든 스님이 계속 계속 나오고 어리둥절하게 구경하는 동안 갈색 옷을 입은 신자들이 끝도 없이 뒤를 따랐다. 


수륙대재라고 했다.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라고 했다. 듣기에 나라에 큰 우환이 있을 때 베풀려고 하는 제사 같았다. 위로하고 혹시 데려가주시기도 한다면 살아있는 저도 데려가셔도 돼요.라는 생각도 하고 말았다. 


길에 주차금지 고깔 치우라고 화낸 스님은 아마 행사 총진행자로 추정. 그 스님한테 혼나고 숨 가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보살님도 큰 책임을 맡은 것 같았다. 그리고 도시락 준비에 늦었다며 소매를 걷어붙이던 신도들, 주말에 절로 끌려 나와 입이 나온 어린 신자들, 옷이 크네 작네 안 보이니 비켜라 하는 사람들. 그래요 우리는 부처가 아니지요. 소란스럽게 노력하는 중생들입니다. 


깃발이 오방색이고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부처는 최고의 신이다’, ‘하나의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도량’ 등의 간판이 있어 혼란스럽고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 바라는 게 있구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에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소설 <토지>에서 어느 가난한 남자의 어머니가 '너의 그 꼬막 같은 배 하나 못 채우겠냐'라고 하셨다던 말. 꼬막 같은 배. 작은 아이의 작은 입으로 들어가 작은 배를 채울 음식.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의 음식도 구하기가 어려워 곤란한 적이 있다는 말. 하지만 꼭 채워주지 않고서는 가슴 아파 못 견디는 그렇지만 또 못 채워줘서 가슴 아파도 결국 견뎌야만 하는 그 꼬막 같은 내 새끼의 배. 이런 마음이 참으로 짠하고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하고 버겁고 또 결국 그것 때문에 산다. 


스님과 신도의 행렬이 절 밖으로 가고 절 안에는 곧 이어질 강설 준비와 음식 준비를 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음향 장비 오퍼레이터들은 불교랑은 전혀 상관없는 기술자들인지 세상 지겹고 회의적인 얼굴로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제사상과 비슷하지만 최소 10배나 커 보이는 상에 음식이 차려 있고 불화들이 걸려 있었다. 초록색 악귀 같은 것이 크게 그려진 그림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무서운 수호신 같은 것인지 그 초록색 인물 뒤로 광채 안에 부처님이 앉아계신 것이 보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작게 보이고 멀리서는 초록색 무서운 사람만 보였다. 


흰 살과 붉은 살이 드러나게 조각한 수박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상 위에 파인애플도 차려져 있는 게 인상 깊었다. 파인애플의 화려한 겉면이 다른 음식들과 퍽 잘 어울렸다. 천막과 또 그 아래 떡과 물과 바나나와 도시락이 궁금하기도 했다. 역시 갈색 옷을 입은 여자 신도들이 바삐 음식을 싸고 있었다. 


겹벚꽃은 아쉽게도 이제 피고 있어 이삼일은 있어야 만개할 것 같았다. 절을 둘러보고 '사찰 장'을 담고 있다는 장독도 구경했다. 철쭉의 짙은 색과 푸른 나뭇잎의 보색대비에 놀라며 절을 나서는데 피리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입구에서 본 스님과 신도들이 따로 차려둔 병풍 앞자리에서 무언가 기도인지 발원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나도 가서 구경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소라를 부는 소리(나각)도 들렸고 승무를 출 때 쓸 것 같은 종이로 된 모자를 쓴 비구니 스님들이 바라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처음 보았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만 알고 있던 고깔을 쓰고 계셨다. 하지만 고깔은 더욱 화려하게 장식된 황색이었다. 바라춤을 추시는 스님의 손은 놋쇠 바라에 엮인 끈을 들고 있으면서도 마치 공기를 쥐듯 가볍고도 가장 부드러운 살덩이를 어루만지듯 탄력 있고 물을 타고 흐르듯 움직였다. 이랬다가 저런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랬다. 이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손을 보며 잠깐 다른 모든 것이 잊어지는 듯 너무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일까? 그중에서도 바라춤을 배우는 스님도 계시는구나. 스님들도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따라 일하겠지. 경력이란 끝이 없는 건가. 스님으로 직업을 정하는 것도 엄청나게 큰 일인데 그 안에서도 무엇을 더 연구할 것인가 자신의 분야를 찾겠지. 늘 도피성으로 속세를 떠나 수녀든 중이든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터라 '역시 나는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며 끝없이 노동하고 수행하는 구도자의 삶에, 결국은 또 어떤 재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바라춤을 추는 스님은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할 때에 나는 바라춤을 추는 중이 되어야지, 했을까? 


강설을 듣고 음식을 얻어먹고 싶었으나 비가 내리기 시작해 돌아와야 했다. 그 큰 행사를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비록 천막이 있긴 했지만 비가 오다니 그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조금 마음이 안되었다. 어느새 겹벚꽃은 잊고 바라춤을 볼 기회가 있다면 시간과 돈을 들여 반드시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도시락이 궁금했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해 집에 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이 행사를 오래 준비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천막 아래서 강설과 음식을 즐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겹벚꽃이 비를 이겨내고 잘 피기를 바라며 절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데 한 스님이 비계 위에서 종이꽃을 뿌리고 있었다. 


어제 나는 이 글을 여기에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보니 4월 16일이었고 4월 16일이라는 날짜는 시각적으로도 충격을 주었다. 그날이구나. 그랬구나. 그리고 더 충격이었던 건 바로 하루 전인 4월 15일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 남의 일이란 이런 것인가. 이토록 먼 것인가. 단 하루 전에도 떠올릴 수 없단 말인가. 

어제의 수륙대재는 세월호를 위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오늘에야 들었다. 어제 그 자리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과 나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아니었겠는가.


종이꽃은 아름답고 약간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한, 그러니까 이미 죽은 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상징이 되어 버린, 하지만 아름다운 종이꽃과 대조적으로 스님이 올라앉아 있는 비계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이고 공사장을 즉시 떠올려서 가슴 한편에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지나가는 스님과 신도의 행렬의 머리 위에서 꽃을 뿌려 내려주기 위해 그 스님은 비계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다시. 수륙대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 외롭게 헤매지 않기를. 더 이상 세월호를 생각할 때 눈물은 나지 않는 나의 마음을 탓하며 그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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