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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Feb 01. 2024

2 결혼

올케언니가 시집오고 나는 그때 5학년쯤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솥에 불 때고 그때부터 언니하고 같이 일을 한다. 단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날 뿐이지 밥솥을 닦노라면 내가 들어가서 닦아야 좋을 듯싶은 큰 솥이다.

언젠가 올케 언니가 내가 일을 너무 잘해서 놀랐다고 했다. 내 엄마라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길들여 놓은 거다. 누구를 시키겠는가.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가 마음이 강하질 못해서. 당연히 엄마를 따라 광주로 갔어야지. 왜 무엇 때문에 눈칫밥 먹으며 큰집에 있어야 했냐 이거야. 엄마도 그렇지 나를 그곳에 둘 게 뭐야 자기 자식을 남한테 맡기다니. 


왜 엄마는 할머니만 미워해? 할아버지가 쓰레기야.


그땐 많이들 그랬어.


그럼 할머니는 무슨 죄야 선택권도 없었는데?


큰엄마는 뭐가 좋아서 내 엄마를 도와 일을 하겠나. 만만한 게 나였지. 그 와중에 시키는 대로 잘했던 것 같다. 어서어서 해 놓고 학교에 가야 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물 긷는 게 큰일이었다. 많은 식구에 많은 물을 써야 하니 아주 큰 일이었다. 일꾼이 둘이나 있어도 가끔씩 물 긷기를 시킨다. 너무 급할 때 혼자 물 긷기가 싫증 나고 지루하면 사촌끼리 셋이서 품앗이도 했다. 하지만 우리 물 항아리가 제일 커서 제일 나중까지 길어야 했다. 

나는 아무 의심도 없이 큰엄마가 어쩌다 잠깐 언니 집에라도 가시면 엄마 올 시간쯤 동네 어귀에 나가 퍼지르고 앉아 기다리다 늦으면 울고불고 서러워했다. 짜증이 폭발하면 양쪽 발등을 비벼 피가 나오게 게하는 버릇이 있어서 상당히 크도록 그런 짓을 했다. 그러다 엄마가 들판 가운데서 가물가물 보이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매달린다. 큰엄마를 의지하고 그곳에 머물러 살게 된 거다. 오빠나 올케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인 줄은 굴뚝 속같이 까맣고 먹물같이 까맣게 몰랐다.


큰엄마라는 사람이 엄마를 아껴 주었었으면 좋겠는데... 어땠을까.


나는 전혀 내가 부담이 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앤지 눈곱만큼도 모르고 다듬이질하다 많이 졸리면 올케한테 미안해하면서 그냥 자고 모시 삼다가도 못 참고 자고 했다. 올케가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올케는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정월 보름날 같은 날 처녀들이 마당에 모여서 돌아가며 노래 부르고 놀 때 나더러 같이 가보자고 하면 나는 거의 싫다고 했다. 물론 갈 적도 있지만 나는 소리가 나오질 않고 잘 놀 줄을 모르니 즐겨하지를 않았다. 그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나보다 7, 8살 위이니 내가 어렸을 때야 작아 보였지만 몇 년 지나면 비슷하기 마련이지.


올케 언니가 시집올 때 예뻤다. 엄마를 분가시키기 위해서라도 오빠가 빨리 결혼을 해야 했다. 오빠 스물둘, 언니 스물 하나. 결혼을 하고 신행을 해서 오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가마에서 내리는데 꽃다발이 나오는 줄 알았었다. 족두리에 원삼까지 입었으니 더욱 화려했다. 동네 큰길까지 트럭으로 와서 그곳에서 가마를 타고 들어왔다. 시누들 입막음한다고 엿을 입에 넣어 주는데 얼마나 달고 맛있었는데. 새댁을 인도하는 한 사람을 선택해서 새댁의 모든 거를 도와주게 하는데 그 역할을 맡은 막내 작은 엄마가 부지런히 언니를 살펴서 큰방 한 중심에 앉혔다. 

색시를 중심으로 모든 눈이 한 군데로 박혀 있었다. 새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힘들어 나중에는 졸려했던 것이다. 한쪽 방으로 신부를 분리시켜 놓고 신부가 해온 농지기를 구경하는데 역시 십자수를 놓아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 왔다. 그중에서 지름이 약 15cm 되는 둥근 물건이 나왔는데 그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다들 모르니까 입이 걸쭉한 고모할머니가 놋화로판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남편의 팔꿈치 받침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우리 또래들도 여러 가지 많이들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들도 하니 해보기는 했어도 시큰둥했다. 내가 누구를 만날 줄. 내가 준비가 돼 있어도 불안한데 가진 게 뭐 있어서 찬밥 더운밥 가려. 그럴 바에야 그만두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버티고 있었다.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혼할 나이가 돼서 선을 보는데 아무 준비도 안 시키고 밭 매다 와서 만나고. 그때 우리 마을에는 아주 옛날식으로 부모가 먼저 보고 합당하면 거의 정해놓고 남자 상대를 만나는 때였다. 시골로 가려면 일하기 싫고 발전도 없는 것 같고 도시로 보내려고 하면 뭔가 부담이 되고. 나하고 동등하다 싶으면 보지도 않고 무시되고 나보다 배운 사람은 나를 무시할까 두렵고 갈 곳이 없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니 많던 친구 동갑내기들이 어디로들 떠나고 둘이 남았다. 열인지 열한 명 중에. 하나 남은 친구마저 곧 시집을 간다고 했다. 무슨 짐승들 짝짓는지 나이가 들면 어디로라도 짝지어 보낼 때였다. 워낙에 시골이고 동네 뒷길도 막혀 개화가 오래 걸리는 동네였다. 


동네에 나 혼자 남았고 요 2, 3년 동안 한해가 들어 집에도 형편이 힘든 상태였다. 시집보낼만하면 우리 형편에 과하게 요구하니 괜한 트집으로 안 보내고. 처진 곳으로 보내려 하니 내가 싫다 하고. 어쩌다 결국 엄마네로 가 있었다. 광주에서도 아버지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주선을 했다. 어른들끼리는 거의 이루어진 상태인 거다. 나도 내 맘에 드는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시집을 포기하는 쪽으로 생각하니 막연하기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기차도 타보지 못한 시골뜨기에다 스스로 뚫고 나갈 길을 모르겠었다. 자읜지 타읜지 모르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니 아버지와 오빠가 서로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한 줄 알았더라면 눈치스러워서 그곳에서 안 살았을 텐데 그땐 왜 몰랐을까.


들으면서 엄마한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친엄마도 엄마를 부담스러워하고. 너무 안 됐다 어린 엄마, 결혼 앞둔 불안해하는  스물다섯 살의 엄마도.


시집을 보내려고 올케네 엄마도 중매를 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조금도 내가 오빠 부부에게 짐이 된다는 걸 생각을 못했던 게 다행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곳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서럽고 비참했을까.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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