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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an 31. 2024

1 옛날 - 스무 살

늘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처한 환경보다 높은 곳을 보았다고 할까. 농촌 계몽 운동 이런 거 한다고 국민학교에서 양재를 가르치는데 먼 집안 언니하고 둘이서 가서 배웠다. 여름이면 블라우스 정도는 만들 수 있어서 그걸 만들어 주고 품삯으로 우리 밭을 매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 다른 일을 시키기도 했다. 나는 늘 부지런히 일을 하고 말은 아예 거의 안 하는 편이었다. 어느 여름날은 읍내로 짚공예를 배우러 아버지 몰래 갔었는데 이틀 뒤 아버지께서 알고 올케 언니를 보내 나를 데리러 왔다. 그땐 2살 어린 사촌하고 갔었다. 올케는 베를 짜다 말고 나를 데리러 왔다고 아버지가 보내니까 할 수 없이 왔노라고 하면서 내가 절대 안 가겠다고 했다고 하라며 일러주고 급하게 돌아갔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만 그렇게 엄격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집에서 옷이며 식탁보며 피아노 덮개 같은 것을 만들곤 했었는데 농촌 계몽 운동에서 배워서 가지고 있던 실력이었단 말인가.


19살 그믐날 저녁을 꼬박 뜬눈으로 보냈다. 어느 순간 내가 스무 살이 된다는 게 머리를 작은 방망이로 맞은 것 같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은 다음에 한 번 더 있는데 바로 나를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다. 이 두 가지가 엄마한테 신체적으로까지 충격적인 두 가지 일이었을까? 물론 다른 일도 많았겠지.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집안일만 하며 스무살이 되다니 스무살이란 원래 막연하지만 엄마는 더 심했을 것 같다.


이제 스무 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좀 있으면 시집을 보내야 한다고 걱정할텐데 피할 길이 없었다. 18살 때부터 그런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서울에 직장이 있는 사람인데 혼인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아버지께 연락이 왔나 봐.


그남자랑 결혼하지! 어떤 남자든 아빠보다 못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엄마는 불행히도 아빠보다 못한 남자도 만나고 만다.


아버지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좀 놀라셨다고 얘기하셨다. 아버지 입장에는 나를 늦게까지 큰 집에 있게 하면서 편하게 큰 집에 오기를 바랐을 거다. 그때쯤은 생모랑 동생들 모두 광주로 가서 사는 중이었다. 남동생을 공부도 시키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결정을 했는데 가자마자 고생길에 들어섰다. 농사 지어 온 쌀을 쌀가게한테 사기를 당한 거다. 아버지는 시골 일도 잘 못하는데 어디 광주에 가서 뭘 하겠는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야지 찬 물 먹고 이 쑤셔도 못하지. 엄마가 일을 나서고 동생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어렵게 생활이 쪼들렸을 거다. 나는 시골 큰 집에 두고 하나라도 더는 게 급했고 나도 큰엄마가 좋고. 특히 올케가 싫어했을 것 같다. 그때는 개미 눈썹만큼도 나는 내가 누구에게 짐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엄마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겨울에 보리밭을 매면서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여기에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주 섭섭했지만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내가 가버리면 큰엄마가 못믿어져서 마음이 놓이질 않았었나. 누군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올케가 부담이 됐겠지.


겨울에 여행하다가 청보리밭을 보고 엄마가 감탄하며 옛 추억에 잠긴 적이 있다. 맙소사 보리밭을 매면서 엄마 따라가도 되냐고 물었다가 거절당하다니.


주일마다 아버지가 시골집으로 오시면 집안이 불안에 싸인다. 오빠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운다. 큰 싸움이 되기도 한다. 오빠가 죽겠다고 식칼을 들고나가서 내가 손 팔목을 물어 칼을 뺏은 적도 있다. 물에 빠져 죽는다고 들샘을 찾아가면 작은 아버지들이 말리기도 했다. 내 엄마가 있으니 은근히 옆에서 속닥거리는 친척들이 많았다. 재산이 새나가기 전에 어서 본인 앞으로 돌리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아버지 오실 날이 되면 집안이 불안했다. 오빠가 너무 일찍 22세에 결혼도 하고 살뜰히 살림을 하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아들 하나 딸 하나에 귀하게만 자라서 공부도 안 하려고 하고 뭐 하나 믿을만하지를 못했었나 보다 아버지 보시기에.


그 아버지도 믿을만할 게 없는데... 엄마는 할아버지(아버지)를 좋아하는 것 같다. 무서워하는 건가. 둘이 비슷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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