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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an 31. 2024

1 옛날 - 노동

상당히 큰 마을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들이 넓으니 동네도 크고 그 건너 마을도 컸다. 길고 넓게 들이 펼쳐져 있고 가운데로 보가 있어 물이 흐르고 내 나이 어렸을 때 수리조합이 생겨 똘(도랑)로 물을 대성 농사를 지었다.

가을밤 달이 밝고 나락은 누렇게 익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벼이삭 부딪치는 소리가 슬프게도 들렸다. 내 마음이 좋으면 고운 악기 소리로도 들렸겠지. 그 무렵 밭에도 곡식이 익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콩 팥 녹두 동부. 겨울에 먹고살아야 할 식량들을 굳으라고 서둘러야 한다. 벼가 늦게 익어서 첫눈이 올 때까지 벼를 논에서 못 가져오면 낭패다. 어느 해는 가을걷이가 늦어서 나락이 다 떠버려서 쌀이 냄새도 나지만 붉은색을 띠는 걸로 밥을 해먹고 살기도 했다. 영양가가 전혀 없는 쌀이었겠지.

1967년인가 8년인가 한해가 들었다. 날이 너무 가물어 비가 오지 않으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모를 심을 수가 없어 모가 모판에서 그대로 말라죽고 어쩌다 겨우 심어 놓는다 해도 아주 물 깊은 곳 아니면 다 햇볕에 타 죽었다. 어쩔 수 없어 메밀을 심는데 호미가 들어가지도 않아 그도 심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려워지면 논밭도 없이 품들어 먹고사는 집에서는 더욱 살기가 어려워진다. 오늘 품 팔러 오면 한 한집에서 한 사람에 모든 식구들이 따라와서 밥을 먹고, 갈 때는 다음날 아침에 끓여 먹을 쌀을 바가지에다 받아 옆구리에 끼고 어린 자식은 손을 잡고 간다. 그 쌀은 내일 품삯이 되는 쌀이다. 그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 다 죽고 없다고 생각하면 허무하다.


그렇게 품 팔고 살다가 겨울에는 가마니를 짠다. 짚을 외상으로 사다가 가마니를 짜서 팔아다 갚고 또 그렇게 하면 겨울을 살아내고 또 봄이면 품팔이하고 각박하기 한이 없어 보여도 그중에도 웃음도 있고 사랑도 있어 자식들은 많이 낳는다. 


무슨 사랑? 할아버지가 사랑의 결과로 엄마를 낳았어? 사랑으로 키웠어? 

이런 물음에 엄마는 답을 잘 안 한다. 


우리도 올케 언니하고 가마니도 짜고 새끼도 꼬면서 남들이 하는 것을 해보지만 잘하지는 못하고 우리 쓸 것을 했었다. 남들이 돈벌이도 하니 부럽기도 했지만 우리는 역부족이었다. 

겨울에 짚벼늘(볏가리)에서 고드름 따먹으면서 양지바른 곳에 앉아 놀던 때가 그립다. 달도 없는 겨울밤에는 관솔에 불을 붙여 들고 골목을 다닐 때면 뭐가 그리 재밌고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밖에서 피운 관솔에도 콧구멍이 까매졌다. 눈 오는 밤에 모여 놀면 이불 하나에 발만 넣고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가위바위보 해서 손목 맞기도 하고 때로는 화투놀이도 하는데 나는 화투가 별로 재미있질 않았다. 친구 하나가 그 아버지도 화투를 좋아해서 집안이 좀 기울었는데 그 친구가 유난히 화투놀이를 좋아하더니 언제인가 들리는 소문이 화투를 쳐서 집까지 없앴다고 했다. 


시집갈 준비를 하려면 광목에 십자수 놓는 게 유행이었다. 베개 모에 동양자수도 놓고 처녀가 되면 남들도 도하니까 나도 하는 걸로 따라서 하는 거였다. 호롱불에 수를 놓자니 머리부터 들이미니 앞머리가 타고 누린내가 나고 콧구멍이 까맣다. 그렇게 애써서 시집갈 때 솜씨 자랑으로 농지기로 가져갔다. 사촌 언니하고 같이 십자수를 놓다가 무슨 얘기를 했던지 웃음이 멈추지를 않아 아버지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다 큰 딸애들이 뭔 짓이냐 그만 근처라. 이런 수놓기도 주로 겨울에 한다. 봄 여름 가을은 주로 일이 많고 더웁고 해서 금방 시집가야 할 사람이 못다 하면 도와주기도 했다. 그도 솜씨가 없는 사람은 하지 못하기도 한다.


엄마의 손을 본다. 그 수많은 일을 하고 밥을 짓고 나를 씻기고 나를 때리고 칼질을 하고 반찬을 무치는 손. 내가 어릴 때 수를 놓던 손. 이제 엄마는 열심히 십자수를 두어 내 아이에게 줄 인형과 쿠션을 만든다. 10대에 십자수를 놓을 때 나중에 이런 용도로 십자수를 하게 될 줄 아무리 옅은 예감으로라도 짐작이나 했을까. 어찌됐든 장면들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 번은 올케 언니가 새벽에 샘에 가서 물을 길어 오더니 어젯밤에 아무개 댁에 닭을 족제비가 물어 갔다고 했다고 한다. 어젯밤에 우리 사랑방에서 청년들이 닭설이를 해다가 구워 먹은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때는 설이를 하면 눈 감아주는 게 보통이었다. 때로는 타 동네까지 가서 잡아다 끓여 먹기도 했다. 닭설이도 긴긴 겨울밤에 청년들이 심심해서 몸이 꼬일 때 했던 짓이다. 배도 고플 수도 있고. 메주도 해서 달아 놓으면 속을 파서 먹기도 했다. 무 구덩이에서 무도 파다 다 먹고. 동치미도 겨울밤 간식으로 최고였다. 그렇게 살고지고 하다 어느새인가 닭 잡아가면 경찰에 고발하고 토끼 잡아가도 고발하고 하더니 지금 세상이 되었다. 그때가 50년 60년 전이니까 그때는 세상이 더디 변했다. 요즘처럼 요동치듯 변하는 세상이 어지럽기까지 하다.


갑자기 물레 생각이 난다. 물레에 미영을 자면 먼지가 얼마나 나는지 코가 간지럽다. 그 실을 한 꾸리 한 꾸리 만들어서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 때부터 모시베는 어떻고. 나무껍질을 벗겨 한 올 한 올 가늘게 쪼개서 그걸 이어서 베를 짜서 옷을 해 입고. 이 과정들을 정확히 잘 모르기도 하고 잘 옮겨 쓸 수도 없다. 베 한 필은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베 잘 짜는 사람은 하루에 한 필을 짜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다. 한 올 한 올 짜서 스무자를 옷감으로 만들어 내다니 나는 그때도 놀라웠다. 대개 나보다 2, 3살 사람들이 일을 하고 젊은 세대는 끝났던 것이다. 나는 베를 짜보지는 않고 미영 잣거나 모시는 삼아 봤다. 

모시 삼기는 좀 난해하다고 해야 야하나. 대체로 오른쪽 무릎을 내놓아야 한다. 무릎을 구부려 그곳에 모시올을 두 개를 대고 밀어 비벼서 이어주고 침을 발라서 서바구니에 동그랗게 사려 담는다. 그래서 모시를 삼으려면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몸을 살짝 돌리고 앉아 무릎을 훤히 내놓아야 했다. 모시베가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들이 있다. 올에 풀칠하는 걸 베를 맨다고 하는데 특히 모시베는 매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사람을 따로 사야 했다. 뭘로 주든 품삯이 나가는 거다. 이렇게 졸여 가며 모시를 삼고 지루하니까 품앗이도 했었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그 일은 여름에밖에 못한다. 모시올이 찬바람에 딱딱해져서 부서지기 때문에 덮고 습도가 높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고구마에 고구마에 고구마 줄기를 삶아서 된장 넣고 식초 넣고 마늘 깨 넣어 무치면 별미 중 별미였다. 그 참을 먹어 가며 모시베를 만들어 여름이면 옷을 만들어 입었다. 우리 아버지는 남들이 무명 잠뱅이도 감지덕지 입는 중에 특별하고도 요염하게 하얗게 풀 먹여 다리미질 한 모시옷을 입고 다니셨다.


염병...


나는 우리 아버지는 일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쩌다 장작을 패고 땀을 흘리시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불쌍해 보였다. 번은 바로 아래 동생하고 아버지 흉을 보다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동생이 화를 냈다. 남의 아빠들은 날마다 출근해서 벌어다 식구들 부양하는데 무슨 말도 되는 소리냐. 시골서도 남자들이 일을 많이 하지 우리 아버지는 틀렸다. 우리들 아니 엄마들은 쉴 새 없이 땀에 절어 일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거다. 그렇구나. 나는 그때야 깨우쳤다. 그렇게 사시니 나는 우리 아버지의 생활을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할 말이 없다. 자식을 그렇게 많이 나았으니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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