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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an 31. 2024

1 옛날 - 우리 집

1950년대


우리 동네는 동쪽으로 상당히 큰 들이 있고 들 지나 옹기종기 다른 동네들이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남쪽을 향해 동네 한 중앙에 자리를 잡고 그를 중심으로 집들이 동서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남쪽에는 북쪽을 향해 지은 집들이 있고 마을 가운데는 텃논이 있어 벼를 심었다. 서쪽에는 집들이 막아 소쿠리 모양을 했다.


엄마가 '우리 집'이라고 하는데 혐오감이 들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엄마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남쪽 편이 우리 집보다 높아서 그곳을 넘어오면 안채가 기와집이어서 눈에 띄었다. 양지바른 집터였다. 우리 집을 위주로 동쪽으로 거의 4촌 6촌들이 살고 서쪽으로 일가친척들이 살았다. 남쪽은 겨울이면 앞에서 북풍이 불어대니 얼마나 추운지 친구집에 놀러 가면 집 마당에 들자마자 얼음이 천지였다. 남쪽으로는 다른 성씨들이 모여 사는데 옛날에 우리 집안이 외가가 된 친척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일찍이 깨어 자식들 공부시키는 데에 열심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우리 집안은 공부를 게을리하고 열의도 없고 특히 딸은 가르쳐서 뭐 하느냐 살림이나 배워서 시집보내야지 했다. 그게 어느 때 일이냐. 조선시대에도 공부를 가르쳤는데 한이 맺힌다. 거기에 내가 대가 세게 나갔으면 좋으련만 못나게도 아버지께 순종만 하고 다 참고. 희생당하고.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엄마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당하고 산 것은 희생일까. 

공부 가르쳤다는 친구네 집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도 그 집 가서 살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시절에 입 하나가 어디라고 엄마를 데려다 먹여 주었을까. 게다가 시퍼렇게 친부모가 있는 걸. (엄마는 둘씩이나 있고...) 하여튼 나는 '집'이라는 말을 들으면 편안함이나 사랑이나 가족 이런 것보다는 싫고 불편하고 원망스럽고 '다른 집은 괜찮을 것 같고'(과연 괜찮을까 이제 와서는 모르겠다만) 그런 마음만 강한 것 같다.


오빠가 결혼을 해서 며느리가 생기니 살림할 사람이 들어왔고 두 엄마가 계속해서 같이 살 수는 없었는지 지내가 14살에 생모와 아버지가 분가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큰엄마 집에 살게 했다. 무언중에 그렇게 알고 나는 받아들였다. 큰엄마가 더 좋기도 했다. 내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생각 자체를 하지를 못했다. 나는 오빠와 올케 언니와 같이 큰엄마와 살게 되고 내가 저쪽 엄마 딸이라는 걸 아예 잊고 살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이용해서 마음 놓고 큰집을 더 편히 드나들었다. 물론 큰엄마가 계시니까 자기 집이겠지만 이제 아들 며느리한테 물려준 집이 아닌가 말이야. 일일이 오셔서 참견하고 오빠하고 불화를 일으키고 온갖 일을 아버지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오빠하고 맞지를 않아 늘 집안이 시끄러우니 그 속에서 나는 어느 쪽에 서야 하나 곤란하면서도 내 엄마한테 가지도 못했다. 엄마도 나를 여기에 두는 불편해하질 않았다. 많은 자식에 집도 좁고 은근히 나를 여기에 두고 싶어 했던 같다.

색다른 반찬을 하면 아침이고 저녁이고 들고 엄마집으로 갖다 드려야 했다. 아버지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 동네 앞을 다 지나 서쪽 저 끝까지 그 먹을 것을 들고 내 엄마와 내 아버지 내 동생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가서 그 반찬이나 음식을 놓고 그대로 큰집으로 왔다. 추우니 들어와라 라더우니 쉬어 가라는 말이 없다. 한 번이라도 거기에 머물면 아버지가 어서 큰집으로 가라고 눈을 부릅뜬다. 혹여 내가 큰집에서 살기 싫어할까 봐 미리 방지했던 거다.  

새벽 그러니까 4시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버지가 큰집으로 오신다.


뭐 하는 인간이지? 


아프셔서 못 일어나는 날 빼고는 거르는 날이 없다. 


아프셔서는 무슨. 


큰 방에 들어가시면 큰 엄마하고 이런저런 살림 얘기도 하고. 처음 분가하고 얼마 동안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큰돈은 언제라도 큰엄마한테 맡겨 놓았다. 아무리 생모하고 많이 살아도 큰돈 큰 살림은 큰 엄마하고 의논했다. 

그때 그 동네는 두 엄마가 있는 집이 여러 곳이었다. 그때 지나고 나서는 그런 집들이 다 없어졌나 싶다. 우리 집을 위주로 동쪽으로 세 집이 있고 서쪽으로 두 집이 있었다. 그때 그 동네 풍습으로 꼭 그래야만 할 집은 한 집이었다고 할까. 


나는 깔깔 웃었다. 무슨 잘난 핏줄이라고? 너무 웃기다. 하 욕을 최소화하자. 


큰엄마가 자식을 못 낳아서 작은 이를 둔 집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었다. 다 우리 성씨였다. 타성 자체가 몇 집 안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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