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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an 30. 2024

1 옛날-두 엄마 두 할머니

1950년대


태어나 보니 엄마가 둘 할머니가 둘이었지. 아버지는 큰아들이었고 아버지의 큰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21세에 과부가 된 큰엄마에게 아버지가 양자를 갔다. 아버지의 어머니도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낳고 돌아가셨다. 이렇게 복잡한 환경이 얽히고설키듯이 내가 자란 그 집에는 늘 밥 먹는 사람이 많았어. 할아버지는 다른 할머니(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하고 막내 작은 아버지하고 같이 살면서 우리 아버지가 당신의 친아들이고. 큰 형수가 자녀 없이 큰 형님이 돌아가신 거지. 내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하고 우리집 계신 할머니(할아버지의 형수이자 아버지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하고 부부인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늘 우리집에 오셔서 할머니하고 같이 아랫목에 계실 때가 많고. 겨울이면 춥다고 걱정해 주시며 화로에 불을 부삽으로 다독였다.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막내 작은 아버지 집이 우리집보다 좀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곳을 윗집이라고 불렀다. 


윗집에도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다. 채가 조그맣고 영리해 보이며 늘 부지런했다. 돼지 새끼를 내서 팔기도 하고 닭을 다른 사람보다 더 키워 팔아서 돈을 만들기도 한다고 할망구가 여시같다는 둥 야물다는 둥 그래서 아들 도와주느라 그렇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잘해도 흉을 본다. 그 할머니가 재취댁이라서 눈을 바로 뜨고 보기가 싫은 거다. 


우리 집에도 아버지 한 분에 어머니 둘. 내 생모는 애금마라고 했다. 어주 어려서는 젖 떼면 큰 엄마한테 붙어서 자고 자라니 큰 엄마가 엄만 줄 알았었다. 할머니(아버지의 큰어머니, 양어머니)가 애미야 젖 줘라 이렇게 해서 애금마라고 불렸다고 들은 얘기다. 아버지는 초저녁에는 큰방에서 큰엄마랑 우리 형제들이랑 모여서 같이 있다가 잠잘 때는 윗방으로 가서 주무신다. 큰엄마한테는 두세 살 터울로 내 형제들이 달라붙어 큰엄마 가슴을 반으로 가르며 서로 선을 못 넘게 젖을 하나씩 맡아서 만지고 잤다. 첫째인 나와 둘째가 큰엄마를 차지하고 셋째 넷째는 순서대로 그 옆에 있어야 했다. 윗방은 큰 방 다음에 광이 있고 그다음 방이었다.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방에 자러 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걸로 하다니. 내 남편이 이 새끼들을 다른 여자 사이에 낳은 것들을 받아서 키우고 미역국 끓여 바치고. 여섯 번을 그렇게 했다. 큰엄마는 시어머니처럼 광을 관장하고 내 엄마는 부엌일을 했다. 말하자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이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13년 14년 정도를 한집에서 두 엄마가 같이 살면서도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이 살았다. 


이런 미친. 그게 뭐야? 미친 새끼 아니야. 지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대?


떽, 할아버지한테! 


꼬박꼬박 하셨다, 주무신다는 무슨? 


내가... 9살 돼서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되는데 아버지가 학교를 가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아마 엄마가 고모를 따라가게 해서 학교에 다니게 된 거야. 입학하러 간 기억은 생생하다. 아버지는 어디 가시는지 저 멀리 쪽에서 흰 두루마기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바삐 가시는 게 보였다. 멀어서 정확히 알 수 없는 거리인데도 아버지가 볼까 봐 고모가 동강이 치마폭을 당겨서 나를 감쌌다. 고모는 7, 8살 위인데 학교를 다니는데 나를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던 걸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한 살 많은 사촌 언니가 있는데 같이 입학해서 둘이서 단짝으로 학교를 다녔어. 입학식 때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네. 


1학년 때는 넓은 들을 지나고 개울도 건너야 겨우 학교에 갔어. 교실도 없고 산등성이에 횟가루 종이를 깔고 공부를 했다. 높은 쪽으로 선생님이 서서 공부를 가르치니 고개만 들면 선생님 모습이 잘 보였다. 고학년들은 교실, 흙바닥에 낡은 의자 책상 비슷한 걸 놓고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고모는 4학년이어서 국방색 천막 속에서 공부를 했다. 어쩌다 천막 속에 들어가 보면 그래도 안이라서 밖에보다는 좋았다.


2학년이 되니 학교를 새로 지어서 유리 창문이 수없이 많이 달려 있고 복도도 책상도 신발장도 있어서 황홀하게 좋았다. 청소할 곳은 많아졌다. 1학년 때는 횟가루 종이 한 장 접어서 책이랑 함께 책보에 싸면 끝이었는데 이제는 바께쓰에 물을 길어다 걸레를 빨아 바닥에 놓고 엉덩이를 쳐들고 밀어서 청소를 해야 했다. 유리창도 문틀에 올라가서 닦아야 하고.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열 살 열한 살짜리들한테 시키고. 그땐 그곳에서는 그랬다. 학교가 다 완성이 덜 된 상태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고학년 저학년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누어 시켰다. 판자를 나르기도 하고, 당가라는 양쪽에 나무 막대기가 있고 가운데는 지푸라기로 엮은 흙 담을 수 있는 도구로 네 명이서 한 곳씩 잡고 흙을 옮기는 일도 하면서 거의 졸업할 때까지 그런 울역을 했었다. 


숙제를 내주면 겨울에는 집에 오는 길에 언덕 아래 앉아서 사촌 언니랑 숙제를 해 가지고 집에 오기도 했다. 햇빛이 잘 드는 쪽에 다른 친구들이 있으면 쫓아내고 나를 데리고 그곳을 차지한다. 그러던 언니가 시골에서 살면서 형부가 일을 안 하니 고생한다는 소식은 가끔 들었고 더 나이 들면 오가면서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자식 셋을 낳아 놓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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