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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un 26. 2024

지렁이

바삐 버스를 타러 가는데 나는 땅밑을 보며 걷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잘 넘어지지 않는 비결이다.


수많은 지렁이가 있었다. 대부분은 죽었고 이미 말라 구부러져 있었다.

10 마리 중 2 번 정도는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곧 말라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단념하고 빨리 걸어 내 갈 길을 갔다.



그런데 며칠 뒤 지렁이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내가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서도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소!


나는 내 나름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항변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는 걸 보면 주워서 흙에 넣어 주자고 했소.

나에게만 특별히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지렁이를 아주 징그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소. 지렁이를 살려 주려는 생각을 하다니 아주 새로웠기 때문이오.

그 친구가 생물을 공부해서 생명에 더 가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진지한 생각까지 했소.

하지만 나는 지렁이를 만질 수가 없었소. 그래서 대체로 외면했소.

하지만 어느 날 내 앞에 아주 심하게 꿈틀거리는, 그리고 아직 물기가 아주 많고 충분히 젖어 있는,

그래서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분홍색으로 크고 통통해서 힘차 보이는,

그래서 아주 징그럽기도 했던 지렁이가 나타난 것이오. 나는 그 지렁이만은 살려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소. 그래서 외면하고 지나치려던 발걸음을 돌려 주위를 살펴 나뭇가지를 주워서

그 지렁이를 구하려 들었던 것이오. 하지만 그 지렁이는 앞서 말했듯이 아주 크고 통통했소.

나뭇가지로 일부를 들어올려도 나머지는 바닥에서 들어 올려지지 않았소. 게다가 나뭇가지로 건드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내가 들어올리려 할 때마다 심하게 몸부림치며 꿈틀거린 것이오! 그 때의 내 경악을

이해하겠소! 나는 조용히 경악했소. 그리고 결국 그 지렁이를 화단의 흙 안으로 던지기까지

나는 몇 번이나 나뭇가지로 그 지렁이를 들어올려야 했소. 그 지렁이가 흙에 떨어진 뒤에 나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는 지경이었소. 이렇게까지 했으니 물론 나는 그 지렁이가 잘 살아가길 바랐소. 그래서

오래 걸리더라도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작정이었소. 그러나 그 지렁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소.

내가 나뭇가지로 건드리는 바람에 죽어 버린 거요!

... 이 일 이후로는 나는 지렁이를 구해주지 않게 되었소. 


내 이야기를 들은 지렁이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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