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드리워지는 공포
늘 액체형 염색약을 구입하기 위해 약국에 오는 중년부인이 있었다.
액체형은 염색하기 힘드니 짜는 튜브형을 사용해 보라고 권해도 한사코 액체형이 익숙하다 한다. 때마침 대용량으로 가성비 좋게 나온 튜브형이 있어서 권했더니 흔쾌히 사간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액체형으로 사갔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남편 흉을 보기 시작한다. 자신을 하도 몰아붙여서 정신이 늘 혼비백산이라는 거다. 그 후 올 때마다 남편에 대해 한바탕 흉을 보고 간다. 그렇게 풀어놓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겠다 싶어서 잘 받아주었다. 한동안 안 보이던 그녀가 남편과 같이 왔는데 말이 뭔가 어눌하다. 치매로 접어든 그녀는 그 후 늘 남편과 같이 오고 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말이 더 어눌해지고, 기억력을 잃어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씁쓸하다.
약국을 하다 보니 건강하던 분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치매로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프고, 남의 일 같지 않다.
인도영화 ‘쓰리 오브 어스’를 보았다.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중년여인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자신이 10대 때 살던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녀, 남편 그리고 그녀의 첫사랑이 그녀의 과거를 찾아다니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하나 둘 기억을 잃어가는 여인의 참담함과 쓸쓸함이 화면 가득 느껴진다. 주로 푸른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 이어 전반적으로 영화 화면의 색상도 어두운 푸른색이다. 검푸른색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 그녀는 왠지 더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영상 자체가 조용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아들과 통화를 끊으면서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여인의 독백이 못내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 역시 치매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노출될 수 있기에, 이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치매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가 무척 많다.
사람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정의 기록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인생에 들어있다. 치매에 걸리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과정과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 듯 낯설어진다. 차차 모르는 타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니, 기억을 잃어가는 본인이 더 주변인을 타인화한다.
살아왔던 인생의 기억들이 사라진다고 그 인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없이 그냥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공유한 추억이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허망할 것이며, 인생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치매는 뇌손상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인지기능이 떨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상태이다. 가장 흔한 원인은 알츠하이머병이고, 그 외에 혈관성 치매, 전측두엽 치매, 기타 질환에 의한 치매가 있다.
이중 알츠하이머병은 치매 환자의 60-80%를 차지한다. 이는 정상적인 노화과정과는 다르다. 뇌 속에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축적되거나, 뇌신경세포 안에 타우단백질이 엉켜 신경세포를 손상시키면서 생기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매우 서서히 발병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엔 최근의 기억을 잊는 것부터 시작되어, 점차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인지 능력이 상실되고, 언어장애, 판단력장애, 정신행동 장애를 나타낸다. 현재까지 완치할 수 있는 치료법은 없으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도네페질이나 메만틴 같은 약물이 사용되고 있다.
알츠하이머 위험요인 중 고령, 유전적 요인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만,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흡연, 비만, 우울증 등도 위험요인 중 하나이므로 이런 것들은 생활습관을 관리함으로써 위험인자를 줄여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얼마 전 약국의 노령환자들 대상으로 처방되던 *콜린알포세레이트(성분명) 계열 약물들이 평소보다 2-3배씩 처방되기 시작했다. 곧 다가올 건강보험 본인부담률이 30%에서 80%로 대폭 인상되는 데 따른 조치였다. 뇌기능 개선제로 알려진 콜린알포세레이트 제제는 연간 처방액이 수천억 원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임상적 유용성 문제와 건강보험 재정지출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면서 정부의 급여 재평가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제약사와 정부 사이에 오랫동안 법적 분쟁이 있어왔다.
결국은 치매환자는 급여가 유지되어 본인부담률 30%, 치매 외 다른 환자는 본인부담률 80%로 인상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콜린알포세레이트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의 전구체(선행 물질)로 작용한다. 아세틸콜린은 기억력 및 학습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성분은 뇌의 손상된 신경세포 기능을 개선하고 신경전달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콜린알포세레이트 제제의 본인부담률 인상이 확정되자 약국을 찾은 환자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다. 노인들에게는 이 제제가 기억력을 증진시키고, 치매를 막아주는 약으로 알려져 있다. 보약 먹듯이 잘 챙겨드신다.
노인들은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치매를 소재로 한 무수한 영화, 드라마, 책들이 그 반증이다. 정부가 노인들의 치매를 막아주는 약값을 올리면 돈 없는 노인은 어떡하냐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약국에서도 이를 설명하느라 한동안 전전긍긍했다. 실제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 약의 복용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횟수를 줄여서 복용 사람들도 늘어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예전 그대로 복용했다. 돈 있는 자만이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치매예방약의 일련의 사태로 말미암아 일어난 엄청난 반발은, 역으로 사람들이 치매만큼은 얼마나 절실하게 피하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