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언어

나를 담고, 세상을 걷고, 영감을 짓다

by 현주 약안먹는약사

공간의 작은 변화

지금 나는 나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딸의 방이다. 딸이 독립하면서 주말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주말이면 우리의 방이 된다.

방의 구조를 정할 때 딸과 나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었다.

나의 의견은 가장 상식적인 것이었다. 테이블을 벽에 붙이고 벽과 마주 보며 의자를 두었다. 뭔가 안정감이 있고 공간이 넓어 보인다는 이유였다.

지금의 구조는 딸이 정한 것이다.

방의 중앙에 책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테이블 두 개를 나란히 두었다. 의자에 앉으면 창으로 밖의 풍경이 보인다. 잠자리는 창문과 책상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늑하고 보호받는 느낌이 든다.

딸은 책상에 머무는 시간과 수면 시간이 길다는데 초점을 맞춰서 가구를 배치한 것이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딸 덕분에 나는 자주 하늘을 보게 되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늘의 변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문장 배치가 의미를 바꾸듯, 하나의 공간에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공간의 활용도와 색깔이 달라진다.


물리적 공간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은 어떻게 될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은 법적으로 4.2평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쾌적함과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최소 6평~8평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 면적은 기본적인 침실, 주방, 화장실 외에 약간의 여가 공간이나 수납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물리적 면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안전 기지' 또는 '개인 영역'의 개념과 연결된다. 이 공간은 심리적 안식처의 역할을 하며, 복잡한 외부 세계로부터 벗어나 정서적 회복과 자아를 재정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어린 시절 나는 형제들과 북적이는 집에서 자라며 그런 공간을 꿈꿨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만의 공간은 방 한 칸일 수도, 서재나 베란다일 수도, 혹은 자주 찾는 카페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나만의 공간은 내가 자주 갔던 만화가게의 한 구석자리 일수도 있겠다.


골목길의 기억

내가 어렸을 때는 유난히 골목길이 많았다.

그때는 단독주택위주에 높은 지대도 많아서 더욱 길들이 구불거렸다. 또한 길 위에 펼쳐진 전선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응답하라 1988’에서는 서울의 쌍문동 골목길이 등장한다.

어렸을 때 우리가 누비고 다녔던 골목길이다. 그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도 하고, 공기놀이도 했었다. 골목길은 의례 아이들의 왁작왁작 소리로 가득했다. 저녁 어스름해질 무렵, 밥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에, 마지못해 돌아가던 골목길. 청춘의 한때에는 남자친구가 집 앞 골목길까지 바래다주곤 했었다. 헤어지기 아쉬워 한없이 앉아있던 골목길이기도 했다.

골목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을 담아내는 무대였다.


여행지의 거리

‘이천 도자예술마을’을 걸었던 기억은 특별하다.

약 1km에 걸쳐 400여 명의 도예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주거하며 작업하는 대규모 예술 마을이었다. 다양한 공방과 갤러리 밖으로는 저마다 식물과 소품이 배치되어 기나긴 예쁜 거리가 탄생했다. 거리 자체가 예술품 같았고, 우리는 마치 예술작품 속에 들어가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족과 함께 걷는 예쁜 거리는 언제나 우리의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거리와 함께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딸려 나온다.

여행을 하면서 찾아다니는 거리들은 미리 검색도 하고 정보도 수집해서 가기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알게 된 아름다운 장소들은 놀라움 속에서 각인되기에, 더욱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제주에서 만난 도서관이 그러했다.


제주도에서 만나 작은 도서관

몇 해 전 제주여행을 갔었다.

관광명소라는 폭포를 찾아갔으나,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했다. 대신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진 숲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도서관이 있었다. 숲 속의 한적한 곳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반원형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자, 도서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멋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공간이 펼쳐졌다. 그 공간 속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프라이빗한 작은 공간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 근무하고 있는 사서들을 보면서 진심 부러웠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통창으로 보이는 앞바다의 풍경이었다. 절벽에 위치한 도서관을 향해 파도가 힘차게 들이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가는 파도를 멍하니 오래 바라보았다.

주거지 주변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가.

이 작은 도서관으로 인해 공간이 주는 충만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위대한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건축물이라고 믿기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온갖 상상력이 그대로 건축물에 드러난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해 내는 인간의 노력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인 가우디가 설계했으며, 1882년에 착공하여 현재까지도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가우디는 성당 내부에 기둥을 숲 속의 나무처럼 디자인하고, 빛을 이용해 스테인드글라스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그 성당에 나타난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보면서, 스페인여행을 꼭 가보리라 결심했다. 가우디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도.


공간에 대한 단상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공간에 대해 적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방에서 시작된 사색은 골목길과 거리, 그리고 건축물로 이어졌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담아내고 문화를 형성하며 기억을 남긴다.

나의 방은 글을 낳고, 골목길은 추억을 품고, 거리는 여행의 기쁨을 주며, 건축물은 인간의 상상력을 증명한다.

공간이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 통의 위문편지에서 시작된 나의 첫 '어른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