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받음에 대한 단상(斷想) 1
대학시절의 선배 언니를 만났다.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언니는 여전히 대학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언니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과 절연했다고 했다. 언니가 텃밭에서 기른 채소류를 나눔 하면, 그때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보내오는 이웃에게 정이 똑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언니의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한 것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묻자, 자신은 순수한 마음으로 준 건데 그냥 받지 못하고 매번 계산적으로 나오니 정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순간, 오래전 나도 비슷하게 겪은 일이 생각났다.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살던 곳이 복도식 아파트라 한 층에 여덟 가구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복도식이라 이웃들과 자주 접했고 같은 층 사람들과의 수다도 잦았다.
아이 키우랴 공부하랴 바쁜 나에게 이웃집 중년의 아줌마는 김치를 담가주기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는 반찬을 만든 그 힘든 과정을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워서 뭐라도 작은 선물을 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줌마가 날 보고 너무 정 떨어진다고, 어떻게 사람 성의를 그렇게 받냐며 서운해했다.
사람 좋던 이웃집 아줌마는 그 이후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때 당시에는, 그때 그 일이 잘 이해가 안 갔다.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까지 정 떨어지는 일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호의는 왜 때로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오래 전의 그 일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타인의 성의에 보답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내가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했나,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적절한 시기에 보답을 했더라면 그렇게 까지 정 떨어진다고는 안 했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계산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상대방은 '주고 싶어서' 줬는데, 즉각적인 보답은 '받았으니 갚아야 하는 거래'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받아왔지만 유난히 고마움으로 남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더구나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받은 고마움이라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 같다. 또한 둘 다 자식과 관련된 일이라 그 고마움이 더욱 큰 것 같다.
납치될 뻔했던 아들을 구해준 어느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
처음으로 약국을 개업하느라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들은 기존의 학교를 다니며 홀로 버스를 타고 집을 찾아와야 했다.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길을 찾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다가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단다.
그곳은 청량리역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이를 납치하여 앵벌이 시킨다는 소문이 흉흉했었다.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우연히 대화를 들었고, 아줌마가 아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데리고 가려하자, 할머니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아들을 빼돌렸다.
자칫 납치될 수도 있었던 아들, 할머니 덕분에 무사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들을 데리고 있다는 할머니 아파트에 가보니, 할머니는 아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었다. 보답으로 가져간 선물도 받지 않은 채 할머니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라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일면불식의 타인이 준 엄청난 호의는 평생의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맡길 곳 없었던 딸을 자신의 딸처럼 돌봐 주었던 아줌마에 대한 고마움
아들과 9살 터울인 딸이 4살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경제적 여건에 맞춘 곳이었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아이를 봐주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주변에 지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퇴근 후 밤늦게까지 아파트 담벼락마다 구인 전단지를 붙였다. 다행히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딸을 봐주게 된 40대 중반의 아줌마, 아들만 키워온 터라 내 딸을 자신의 딸인양 엄청 예뻐하며 돌봐주었다. 잘 돌봐 주는 것만도 너무나도 감사한 일인데, 퇴근 후 딸을 데리러 가면 딸의 양손 가득 선물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부터 간식거리, 옷까지. 아이 봐주는데 주는 돈보다 더 많은 것을 늘 받아왔다.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것에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단지 물건이나 시간을 받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받는 일이다.
이제 나는 감사함의 빚을 즉각적인 계산이 아닌, 시간을 두고 진심을 담아 기회가 될 때 표현하는 연습을 하려 한다.
그리고 그 감사함은 나 아닌 다른,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갚아나가려 한다.
호의가 호의로 이어지는 세상, 그것이 진정한 '주고받음'의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