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를 엿보다
나는 누구인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이 질문에 대해 동양철학에서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으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나는 어떤 기질을 타고났는지, 나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것과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를 여덟 글자 안에 담아서 보여준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에 대한 공부의 시작은 거창한 철학적 탐구보다는 엄마들의 절박함이었다.
아이들이 중2 때 만든 엄마들 독서모임이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고3이 되었다. 수능을 앞둔 아이들이나 엄마들 모두 긴장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수능을 헤쳐나갈지 혹시나 도움이 될 운(運)이라도 있을지 궁금했기에, 독서모임에서 사주명리에 대해 공부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선정한 책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일단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타고난 비겁과 더불어 식운, 재운, 관운, 인성을 알게 되었다.
나의 정체성이자 조력자인 '비겁(比劫)',
재능과 활동력 그리고 먹을 복을 뜻하는 '식운(食運)',
노력의 결실인 재물운 '재운(財運)',
나를 절제시키고 사회적 틀 안에 머물게 하는 직장운인 '관운(官運)',
그리고 학운과 문서운을 뜻하는 '인성(印星)'까지.
사주에서는 이 기운들이 서로 돕거나(상생) 견제하며(상극)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이상적으로 본다.
아이들의 사주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으로 제각각이었다.
인성이 부족해도 재운이 넘치는 아이, 관운이 유독 강한 아이, 혹은 오행이 골고루 섞인 아이.
아이들이 고3인지라 이때의 최대 관심사는 무조건 인성이었다. 일단 학운이 있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은 학운이 중요하겠지만, 인생을 길게 놓고 봤을 때 어떤 것도 좋고 나쁜 것은 없어 보였다.
사주팔자(四柱八字)
이후 가족과 지인들의 사주를 풀이해 보며 '팔자'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태어난 년, 월, 일, 시라는 네 개의 기둥(사주)과 여덟 글자(팔자) 속에 담긴 목, 화, 토, 금, 수라는 오행의 배열은 분명 사람마다 다른 기질을 만들어낸다.
오행의 숫자가 같다 하더라도 사람의 운명은 같지 않은데, 자신을 나타내는 기준점인 일간(日干)이 정해져야 하고, 그 일간을 기준으로 오행은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 깊이 공부하면 사주명리가 엄청 어렵다고 한다. 나는 책으로 간단히 기본만 공부했을 뿐, 깊이 공부하거나,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자세히 알수록 오히려 정해진 틀에 갇혀 운명론에 끄달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정체성과 내가 지닌 역량정도만 아는 것에 만족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의 운명
문득 서양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떠올랐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행복을 결정짓는 세 가지 근본적인 요소로 인격, 재산, 평판을 들었다.
인격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결코 변하지 않는 고유한 것으로 건강, 외모, 기질, 성격, 지성이 포함된다.
재산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한 부는 오히려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방해하고 권태에 빠지게 만든다.
평판은 타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나의 모습으로 본질적인 행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평판에 집착하는 것은 타인의 노예가 되는 길이라고 보았다.
재산이나 평판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기에 상황에 따라 변하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은 자신의 고유한 내면의 모습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외부에서 빼앗아 갈 수도 없다. 해서 인격이 사람의 운명과 행복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사주명리학에서 말하는 일간(日干, 나를 상징하는 글자)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운, 나쁜 운은 따로 없다
간단하게나마 사주명리학을 엿봄으로써 나 자신과 가족의 타고난 인격과 갖춘 것, 부족한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운명론자가 되거나, 운명을 탓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가진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며 기량을 넓혀 나가면 될 것이고, 못 가진 것에 대해서는 욕심부리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이다
어떤 운을 가졌든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고 본다.
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운(매년의 운)과 대운(10년 단위의 운)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운도 잡을 수 있으며, 아무리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도 노력 없이는 그 운을 잡을 수는 없다. 또한 꾸준히 노력하는 자는 운도 바꿀 수 있다.
팔자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나의 선택
그런데 근본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기는 하다.
노력하려는 열정이나 진리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조차 타고난 '인격'의 일부라면,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공평함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본다.
타고난 팔자를 바꾸지는 못해도, 그 팔자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믿으면서, 오늘도 나는 나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