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낯선 줄만 알았더니 내가 낯설어졌구나.
약 123년 전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가 끝난 후, 박람회의 총책임자이자 언론재벌인 드 영이 건물의 관리를 맡아 미술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드 영 뮤지엄의 시초가 되었다.
30년 전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서 2005년 다시 지은 건물은 건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멋있고 독특했다. 뮤지엄이라는 이름이 더 그렇게 보이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겉면을 동으로 마감해서 세월이 감에 따라 공기중에 산화되어 녹색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때 남편과 함께 드영 뮤지엄에 왔었다. 그때는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던 때라 '여자가 진주 귀고리를 한쪽만 했구나. 음~'하고 끝나버렸다.
몰랐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그림이었다는 것을. 가기 전에 알았다면 남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감명 깊게 더 자세하게 그림을 봤겠지? 내가 언제 또 실제 이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아무리 비싼 명품을 걸치고 들고 입는다 해도 그것이 명품인지 아닌지 구별할 줄 아는 식견이 있어야 이야~하지 나에겐 시장표나 명품이나 매한가지다.
모차르트니 쇼팽이니 살리에리니 알아야 그들의 음악이지 모르면 그저 '클래식이네'로 끝나버리는 것처럼.
페르메이르 특유의 미묘한 빛의 표현,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구성, 선명한 색채가 특징인, 우리에게 비밀스러움이 어우러진 신비감을 주고 있는 저 그림이 나에겐 그림의 제목만큼만 느껴지는 것처럼.
드 영 건물의 뒷 쪽에 주차를 했다.
'뒷문으로 들어가면 빠르겠네'라는 짧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도 숲으로 통하는 트레일만 보일 뿐 드 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질 않았다. 정문으로 들어가라는 표지판만 보일 뿐.
뒤돌아 가려는데 앞에 로즈가든(Rose Garden) 팻말이 보였다.
꽃을 좋아하는 소윤이가 좋아할 듯하여 예정엔 없었지만 로즈가든으로 향했다.
'음.. 장미꽃 재배하는 곳 같은데?'
가든이라고 하기엔 꽃이 몇개 피어있지 않아 황량한 느낌이었다.
몇 개 없는 장미 옆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내가 어릴 때 보던 꽃들과 비슷한 것들이 보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내 기억이 알고 있는 우리 집 앞마당에 피어있던 그 꽃들. 꽃술을 떼어서 귀고리를 만들고 놀았던 기억이 났다. 어린 시절 여자보단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인형놀이보단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좋아했었는데 꽃으로 귀고리를 만들어 귓구멍에 꽂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마당에 귀고리를 만들다 실패해서 버려진 꽃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던 장면이 기억 속에 있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 살았던, 우리끼리는 '꼭대기집'이라 부르는 그 집에 있던 꽃 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마당의 어디쯤에 피어있었는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추억이란 뇌의 어딘가에 기억들이 속속박혀 잠자고 있다가 그 기억과 비슷한 것들에 깨어나 근처에 있는 기억들을 데리고 튀어나오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꽃을 보고 옛 귀고리의 추억이, 꼭대기 집이, 마당의 한쪽 구석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이, 그 옆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생각나듯이.
소진 남매도 지금의 이런 순간들이 기억 속에 소복소복 잘 쌓이길 바란다. 나중에 언제라도 튀어나올 소중한 추억 들일 테니까.
드 영으로 향했다.
드 영 뮤지엄 밖에도 볼거리가 많다. 흔히 볼 수 있는 연못도 드영의 연못은 더 멋있고 그 안의 꽃들도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사람 얼굴을 한 사자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 얘 여자야."
"응?"
얼굴은 분명 남자고 사자 같은데? 그때 소윤이의 손가락이 가리킨다.
"얘 젖 있잖아."
"그렇네. 젖 달린 사자구나."
돌아와서 알았다. 이 것이 스핑크스라는 것을.
무지한 나에겐 스핑크스도 한낱 사람 얼굴을 한 사자로 끝나버린다.
뮤지엄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매표소가 눈에 띈다. 매표손지 안내데스큰지 그것들의 짬뽕인지 여러 사람이 쭉 서 있는 모습에 바로 가서 입장권을 끊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밀려왔다. 애써 눈길을 외면하고 항상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 새가 죽었어요."
"응?"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 여러 새들이 뒤집어졌다 산산조각 났다 하는 영상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네.."
뭐라도 더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지?' 비록 나에겐 별 감흥은 없을지라도.
그 옆으로 기념품 상점과 식당이 보였다. 상점밖에 슈퍼맨 그림이 걸려있고 그 밑에는 연말에 가게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해 달력을 말아놓은 것처럼 돌돌 말린 포스터들이 있었다. 진우가 슈퍼맨을 좋아하니까 '방에다 하나 걸어줄까~'하는 생각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공짜로 주는 건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꺼내올 뻔했다.
<$19.00>
참.. 슈퍼맨 그림 하나가 뭐가 이렇게 비싸담.
내 부끄러운 손길과 당황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우아하게 아무 일 없듯이 내려놓았다.
"배고파~배고파"
"빵 사줘~빵 사줘~"
진우가 짜증을 시전 했다. 분명 나오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왔건만 나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라니.
'대체 너의 뱃속엔 뭐가 들은 거니.'
식당으로 갔다. 표를 끊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가는 곳곳 무료로 볼 수 있게 전시품들을 벽에 걸어놓은 박물관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평일 낮이라 한가로이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보는 백발의 할머니, 둘셋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모님들, 간단한 간식을 먹고 있는 베이지색 면 반바지 차림의 할아버지. 우리처럼 애들과 엄마의 조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식당 안의 차가운 호기심의 눈길들이 슬쩍슬쩍 우리에게 꽂히는 것 같았다.
짐이 가득 실린 유모차가, 내 아웃도어용 패스트 드라이 바지와 운동화의 조합이 부끄러웠다.
"조용히 해. 여긴 조용히. 얘들아 조용히."
조용한 분위기에 더 주눅이 들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조용히 얘기를 했건만 식당 안은 우리의 소리로 가득 찬 것만 같다.
얼른 빵 하나를 사서 소진 남매의 입을 막았다.
내 앞에 줄을 선 젊은 여자는 로즈 와인과 주전부리를 샀다. 로즈와인이라 써진 캔을 집어 들기에 캔와인도 있구나 했는데 계산할 때 보니 와인잔을 줬다. 나는 혼자일 때 왜 이런 한가로운 여유를 즐길 생각을 못했는지 후회와 부러움으로 젊은 여자가 앉은자리로 자꾸 시선이 갔다.
나도 한가로이 앉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보며 책을 읽고 싶었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혀로 오로로로 돌리며.
"초콜릿 안 먹어."
"거긴 내가 먹을 거야."
소진 남매가 얼마 안 남은 빵을 두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식당 밖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안에서는 꺼낼 수 없었던 우유와 초코파이로 다시 소진 남매의 입을 봉했다. 어셔 조각정원이 있는 잔디밭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겼다. 소진 남매와 뮤지엄 안의 정원에 앉아 있으니 항상 미국이 낯설게 느껴졌었는데 내가 낯선 사람이 된 것 같다.
어느덧 4시가 넘어 안개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시작되었다.
"엄마 저기 봐. 불났어."
안개가 화재 연기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이미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밖으로 나왔다. 소진 남매는 밖에서 돗자리 펴고 피크닉을 하자고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터라 조금 더 늦으면 깜깜해진다고 겁을 주고는 차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차 옆으로 지나가는 로즈가든 팻말이 보였다.
“엄마, 오늘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어요. 바람만 불고 춥고 놀이터도 없고.”
뒷좌석에 앉은 소윤이가 툴툴거렸다.
‘역시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최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