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안주빨인가요 장비빨인가요?
이민자가 된 후로 한국에 있을 때처럼 돈을 무분별하게 쓰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 무분별하게 쓴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거다.
1. 집에 계란과 밥이 있는데 밖에 나가서 사 먹기
2. 운동화가 이미 한 켤레 있는데 또 사기
3. 청색 검은색 청바지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또 청색 청바지 사기
4. 들고 다닐 가방이 있는데 다른 더 예쁜 가방 사기
결론은 이유 없이 외식하기. 있는 것 또 사기
미국에 오기 전부터, 아니 오고 나서도 엄마가 계속 겁을 주는 바람에 처음엔 돈 쓰는 게 무서워서 쓰지 못했다.
"남의 나라에서는 현금이 있어야 해. 무슨 일 생기면 누가 갑자기 도와줄 수도 없고. 아껴 써야지. 한국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사고 싶은 게 한둘이겠는가. 쓰고 싶지만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 참을 뿐이지. 한국에서는 보는 눈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인답게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옷과 신발, 가방을 사댔었다. 미국에서는 보는 눈들이 주로 파란 눈들이라 꾸며 봤자 그들의 눈엔 별 의미 없을 것이란 생각에 쓸데없이 사고 싶지 않았다. 주부가 된 후로 현모양처가 되고자 알뜰히 가계를 불리고 남들 눈보단 아이들 건사에 더 신경을 썼던 것도 있다.
그러던 내가 여행을 하기로 결심을 한 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폭발하는 샴페인처럼 참고 참아왔던 욕구가 터져 나왔다. 초인종이 ‘띵동’ 울리면 소진 남매는 장난감을 들었든 숟가락을 들었든 화장실에서 똥을 싸던 오줌을 싸던, 무조건 뛰어 나간다.
‘띵동’
"와~~~~~~" "택배다"
초등학생 시절 50m 달리기 출발선에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엉덩이 높이 들고 호루라기 소리가 "삑" 울리면 이렇게 뛰었었다. 후다다닥
장난감이 들어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애들 가방, 내 옷, 모자, 접으면 손바닥만 해지는 돗자리, 도시락통, 도시락통을 담을 가방, 물 없이도 99% 소독되는 손소독제, 가볍고 작은 유모차, 차에서 애들 가방을 걸어놓을 가방걸이,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윤이를 위한 야외용 그림판이 들어있다. 이 중에 가방, 옷, 모자, 돗자리, 도시락통, 가방, 유모차는 이미 있다. 있는 걸 샀으니 내 기준으론 무분별하게 산 쓸데없는 소비다. 지름신께서 말씀하셨다.
"혼자서 애 둘 데리고 배낭 메고 여행 하기엔 지금 있는 것들은 너무 무겁고 크다. 바꿔라."
남편이 보고 말없이 맥주 한 캔을 땄다.
"저 상자들 사진 찍어야겠다."라는 말과 함께. 내가 무엇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주는 남편이 저렇게 얘기하는 건 매일 오는 박스들에, 그 수만큼 줄어들 잔고에 당황하고 있는 거다.
“한국만 과대포장인지 알았더니 여기도 상자들이 엄청 크네."
애써 민망함과 미안함을 포장 탓으로 슬쩍 돌린다.
시작은 그랬다. 술자리에선 안주빨, 뭔가를 시작할 땐 장비빨. 술자리에서도 안주부터 먹었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난 다음에야 술을 마셨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난 유일하게 겨울 스포츠로 보드를 탔다. 지금은 타지 않으니 과거형이 되었지만. '그때는' 최신 유행 보드복과 장갑, 헬멧, 고글, 방한 마스크, 보드와 부츠까지 일단 장비부터 갖췄다. 그리고 배웠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밤 새 탔고 매 해 겨울이면 거의 스키장에 가서 살았다. 넘어져 무릎이 멍들고 추워도 포기하지 않았다. 돈부터 쓰고 나면 책임감과 돈을 엮어 책임감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중간에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힘이 생긴다. 되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들인 돈이 아까워서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썰자는 마음으로.
지금도 그런 책임감을 나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되돌아오지 못할 지점까지만 가면 된다.
“아 못해 못해. 할 일이 얼마나 많아. 가까운 놀이터나 가자. 오늘만 티브이 좀 봐.”
이러고 없던 일이 되지 않도록. 일단 시작했으니 내 스타일대로 준비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잘 즐기면 된다. 힘들면 좀 쉬고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나가면 되지.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내 삶을 풍성하게 채우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할 수 있다.
당신은 안주빨인가요 장비빨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