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풍선을 예쁘게 채우고 있나요?
미국 밥 먹은 지가 햇수로 7년 째이건만 아직도 쉬(She)와 히(He)가 뒤죽박죽이다.
머릿속으로 '소윤이는 쉬쉬. 진우는 히히.'하고 되뇌지 않으면 진우는 쉬(여자)가 되고 소윤이는 히(남자)가 되는 일이 다반사다. 길을 걷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쏘리'하는 미국에 살면서도 그 뜬금없게 느껴지는 '쏘리'에 당황하여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유아 웰컴'하는 일도 많다. '쏘리'와 '땡큐'도 시간이 갈수록 짬뽕이 된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있는 나처럼 내 언어도 그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다.
미국에 오기 전엔 미국에 오래 산 사람들은 영어를 다 잘하겠구나 생각했다. 나도 미국인들처럼 '쏼라쏼라'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할 꿈에 부풀었었다. 살아보고 알았다. 미국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영어 실력과 관계가 없음을...
"이제 영어 잘하겠다."
한국에 가면 누가 꼭 이 얘기를 한다. 그럼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뭐.. 그냥저냥 밥 먹고 쇼핑은 할 줄 알지 뭐.."(바디랭귀지도 포함해서..)
미국에 살아도 언어는 적응이 안되지만 먹는 건 적응이 잘 됐다. 한국은 전화 한 통 하면 바로 짬뽕이 오고 치킨이 왔는데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 복합적이 이유로 매 끼니 집에서 해결한다. 그 이유란 배달이 안되기도 하고, 된다 해도 밥값보다 배달료가 더 비쌀 것 같기도 하고, 짬뽕 대신 피자를 양념 치킨 대신 오렌지소스가 발라진 치킨을 먹고 싶진 않아서다. 귀찮으면 빵과 우유, 더 귀찮으면 시리얼과 우유로 한 끼를 대충 때운다. 아이들에 맞춰서 어른들도 이런 간단한 끼니에 적응이 됐다. 아침엔 주로 빵을 먹는다. 영양을 생각해서 치즈 한 장을 얹거나 혈관에 좋다는 땅콩버터, 사치 좀 부려서 아보카도라도 올려서 먹으려고 노력은 한다. 노력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아 보통은 잼 바른 빵이 대부분이지만.. 아이들은 우유, 어른들은 커피와 함께.
"빵하고 커피를 미국에서만 먹는 줄 아니? 한국에서도 아침에 빵이랑 커피 먹거든."
이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난' 한국에서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한국에 가서 먹는 아침식사는 37년 간 내 입맛을 길들인 한국 음식이다. 밥과 반찬, 국 혹은 찌개를 먹으며 아침부터 하루 섭취 나트륨을 가뿐히 넘겨줘야 한국에 대한 그동안의 그리움을 뼛속부터 보상받는 느낌이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카페에 가서 허니브레드와 생과일주스는 먹었을지언정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들이나 만나서 고급스럽게 수다 떨 때 윤활유 정도로 목구멍에 조금씩 넣어줬을 뿐이다. 캐러멜 마키아또나 바닐라 푸라푸치노와 같은 제일 달달한 것들로. 밥 값이랑 비슷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까운데 돈 주고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왜 사 먹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끔 멋에 한번 마셔보려고 해도 그 쓴 맛이 내 입맛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무조건 쓴 커피. 누가 커피를 산다 해도 가장 싼 그냥 커피를 마신다. 아메리카-노보다 오늘의 커피가 몇 백 원 싸다. 그리고 더 진하다. 내가 가는 피츠는 그렇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그런 사람과 살다 보니 슬슬 내 혀도 쓴 커피에 적응이 되었다. 예전엔 그저 쓴맛이라 커피맛을 정의 내리던 내가 이젠 커피의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알아차릴 경지에 이르렀다. 나도 쓴 커피만 마신다.
커피포트의 전원을 누른다.
'드르르 드르르' (커피 두 잔 값이면 살 수 있는 커피포트여서 그런지 소리가 그렇게 고급 지진 않다.)
곱게 갈린 커피가루에 뜨거운 물이 닿으면서 '폭폭' 구수한 향기와 함께 새까만 커피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남편은 아침마다 커피포트에 용지를 깔고 커피를 갈아서 넣고 물을 채워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커피가 나올 수 있도록. 남편의 아침 메뉴도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남편의 커피는 나에 비해 고급 지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잔을 놓고 그 위에 커피를 갈아서 넣고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장인의 손으로 커피를 내려 마신다. 밖에서 안으로 한번 휘익 붓고, 안에서 밖으로 한 번 휘익 붓고. 그렇게 커피가루를 한번 적셔주고 기다렸다 다시 밖에서 안으로 휙, 안에서 밖으로 휙. 손이 많이 가는 커피를 매일 아침 만들기도 번거로울 텐데 내 커피를 준비해주는 정성이 고맙다.
"잘 잤어?""갈게.""잘 자."
세 문장만으로도 답답할 것 없이 살 수 있는 상 경상도 남자에게는 아침마다 일상으로 하는 그런 특별하지 않은 일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애들 데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볼까 해. 아마 집에 도착하면 5~6시 될 거야."
"괜찮은 생각이다. 애들도 엄마랑 다니면 좋아하겠다."
"밥 좀 해놔 줘. 오면 바로 밥 먹고 씻기고 재워야 할 테니까."
"그래"
여행을 하는 날이면 남편이 퇴근해서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 들어와야 할 때도 있을 거고 밥을 해야 할 때도, 설거지며 청소, 빨래도 가끔은(?) 해야 할 거다.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소진 남매와 여행을 한다는 생각은 생각만으로 끝났을 거다. 그 여행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남편이 고맙다.
여행의 시작은 남편이었다. 남편을 만나고 아이들을 만났으니까. 남편은 혼자 하는 여행보다 같이 하는 여행이 훨씬 더 풍성한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혼자일 때의 인생이 고통의 멍에를 지고 가는 삶이었다면 지금은 소풍 같은 삶이다. 여럿이 함께 즐겁게 이 세상에 소풍을 나왔다는 그 생각이 좋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좋다. 인생을 소풍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시인의 맑은 의식에 경탄했다. 소풍에 어울릴만한 핑크색 풍선에 예쁜 추억을 넣고 넣고 점점 부풀어 오르면 새지 않게 잘 동여매서 한 손에 꼭 잡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이것 좀 보세요."하며 내 풍선 안의 추억들을 자랑하고 싶다.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다왔다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왔다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