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합2:5-6]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어떻게 살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일만 가지는 될 것 같다. 어떤 자매의 대답이 마음에 와닿았다. "내 장례식에 사람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 그런 삶을 살고 싶어." 어떻게 죽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많은 울림이 있었다. 의미 있는 죽음이라면 의미 있게 잘 살아왔다는 것이니까. 그 첫 번째는 주님 앞에서의 의미여야겠지만. 삶의 마지막에 나를 의미 있게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도 이 땅에서 잘 살아왔다는 방증 아닐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마지막, 바벨론의 마지막이 참 초라하다. 강대국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이 추하고 흉하다. 위로할 자 하나 없는 그 강대국의 멸망을 보면서 주님이 없이는 잘 살아도 못 살고 화려해도 추함을 본다.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던 바벨론이다.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가면 스올이다. 주님 없는 삶, 주님을 향하지 않는 열심은 자기의 욕심이다. 그 욕심은 자족이 없는 사망의 길이다.
주님 없는 나의 열심은 고통이지만 주님을 향한 나의 열심은 기쁨이다. 매일매일 우린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없는 열심을 내지 않기를. 욕심내지 않기를. 나는 영혼을 사랑하며 나누는 삶, 하루하루 예수님 닮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의 마지막이 주님 앞에 의미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