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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Sep 03. 2020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우주를 품은 사람들

사람을 대할 때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에 대한 뒤늦은 다짐

   최근엔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 그중에서도 소설의 서술자의 시점을 가르치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소설 속 서술자는 3인칭이며, 관찰자며, 다양한 종류가 있는 반면 현실은 전부 1인칭 주인공 시점뿐이라는 거다. 전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그렇게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학생들에겐 소설 속 서술자의 시점을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서술 중에 '나'라는 지칭이 등장하는지를 먼저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 '나'라는 말이 나오면 1인칭 서술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3인칭 서술자인 줄 알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모든 이야기가 '나'를 중심으로 해설되는 '1인칭'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신기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 서술자인 셈이다.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갓난아기든, 유명인이든 비유명인이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인생은 1인칭 주인공의 입장에서, 우주에 방불하는 복잡한 세계관을 설정해, 온갖 사건과 갈등이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잘 모르는 상대의 한쪽 면 만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해버리는 건 그 얼마나 가벼운 행동일까. 하물며 가상의 이야기 속 꾸며낸 인물들조차 조명하는 관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그려지기 마련인데 현실의 인간은 얼마나 복잡하고 입체적일까. 그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나'는 어디까지나 3인칭 관찰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흔히 하는 착각은, 내 앞에 선 인물의 가장 먼저(쉽게) 보이는 평면이 그의 전부일 거라 속단하고 그 뒤에 숨은 입체의 부피를 몽땅 잊는 것이다. 말하자면 3인칭 관찰자가 제가 전지적 작가인 줄 착각하고 섣불리 편집자적 논평 같은 걸 해대는 꼴이다.


   내가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기고 사는 말이 있다. 격언이나 속담 같은 거창한 말은 아니지만 나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늘 '내가 참고 있는 만큼, 상대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쓴다. 무언갈 좌우명으로 삼는다는 건, 해당 부분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방증이다. 맞는 것 같다. 나는 그리 날카로운 성격은 아니지만 남에게 썩 너그러운 편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금방 괴짜 취급을 해버리고 나와 다른 의견은 쉽게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러므로 위의 좌우명은 내겐 자아성찰의 일환이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의 일종이다. 


   한편 나는 그렇게 간단히 남을 판단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오해하는 건 못 견딜 만큼 질색한다. 그럴 때면, '네가 나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그래?' 하며 속으로 쏘아붙인다. 무척 모순적이고 치사한 마음이다.


   어릴 때 가장 속상했던 경험 중 하나가 억울한 오해로 친구와 다퉈 친했던 사이가 영영 틀어져버린 일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에 있었던 일인데 그다지 크게 다툴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주변 아이들의 부추김에, 지금껏 만나지 않고 연락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나를 '공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애'로 섣불리 정의하고 오해하는 친구들이 미워서 그게 그리 상처가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지금껏 살면서 그와 비슷한 섣부름으로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아직도 난 그러고 있을지 모른다. 학원에서 강사일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순간순간 상대를 정의하고 그 편견에 맞추어 틀에 갇힌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쟤는 불량한 학생이야', '쟤는 숙제도 빼먹고 수업시간마다 조는 게으른 성격이네'- 결국엔 1인칭의 크고 복잡한 우주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조각 하나를 보고 한 얕은 판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내가 참고 있는 만큼 상대도 참고 있다'는 좌우명과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모두에게 세상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대화도 않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전지전능한 방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좀 더 묻고 대화해보려 노력하고 싶다. 그러다가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되면 그건 또 그런대로 지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난 그렇게 더 관대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죽을 때까지 1인칭 시점으로 머물고 말 것이란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녹음, 녹화, 촬영 등의 수단을 이용하거나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 내 모습을 3인칭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어질지도 생각을 하며 더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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