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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딸로 살기 싫어졌다.

1-5. 이름표를 내려놓으며.

by 이 순간


"상담자도 상담받나요?"


상담을 오래 해온 사람이지만,

저 역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기에

그때마다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책의 1장은

내 안의 무의식과 감정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쓴 오래된 글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흐름은

결국 "괜찮은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도

그 여정에 함께 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내가 착한 딸인지 몰랐다.

그저 어머니가 안쓰러웠고 돕고 싶었을 뿐이다.


유년기 때 잠시 좋았던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어머니의 마음에 동조되며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만 멀어졌을 뿐,

몸은 멀어지지 못했다.


어머니가 필요로 할 때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말동무가 되거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아빠가 네 말은 들으니까.”

라고 말했고,

그럴 때면 나는

집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보호한다는 명목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화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화의 대상이, 내가 되기 전까진.






아이를 낳고 나면

어머니의 희생과 큰 사랑을 알 수 있을 거라고들 했다.


물론,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 아이가 커가는 걸 보며

나는 내 아이가 나처럼

어린 시절을 남을 위해 -

그게 가족일지라도 - 쓰지 않길 바란다.


반짝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어린이다운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요구하면서도

조건 없이,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를.


아직도 내가 착한 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머니의 끝없는 감정 토로 속에서

내가 귀와 입을 닫고,

과거에 대해 원망 섞인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상담받더니
착했던 애가 다 망가졌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망가진 건 내가 아니었다.


단지 오랜 세월,

‘착한 딸’의 이름표를 내려놓았을 뿐.


이제 나는, 오롯이 그냥

‘내’가 되기로 했다.






덧붙이며


나는 어릴 적, 화장실에서 휴식하곤 했다.

당시 화장실 바닥은 장판 같은 재질이어서

화장실 바닥에 수건을 한 장 깔고 누우면

꼭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온전히 문을 잠글 수 있고

내가 열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면,

말없이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안아주면 많이 놀랄 테니까.


나와 가족을 알아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걸음 물러서서 나의 원가족을 이해하고,

원망의 감정 대신 받아들임의 시간을 가지며

이제 나는

조금씩 통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글은

그런 내가 변화를 결심하기 전에 쓴 기록이다.

아직 말 못 한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고,

한편으론 이런 글을 읽으면 상처받으실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글들에서,

이 과정을 천천히 나눠 보고자 한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나는 여전히 변해가는 중이고,

그 변화는 앞으로도 천천히 계속될 것이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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