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아Sora Aug 04. 2022

말이 안 통해도 치료는 해야죠

외국인 중풍 환자 치료기


차트에 '일반'차트가 떴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차트를 보면 일단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보통 우리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환자들은 '국민공단'이라는 차트가 뜬다(그 외에 보호 1종, 차상위 등이 있다). 의료진들은 환자 차트가 '일반'이라고 뜨면 의아해하면서 이름을 확인해본다. 외국인들이 '일반'으로 뜨기 때문에 이 환자도 외국사람인가 하며 이름을 확인했는데 이름도 세 글자이다. 궁금증은 병실로 가면서 들려오는 중국어에 풀리기 시작했다.


환자는 30대 남성으로 중국인이었다.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져서 응급실로 갔더니 뇌출혈이었다는 것이다.

환자는 한국어를 못하고 통역사가 내가 물어보는 것들(가족력, 고혈압/당뇨 등 과거력, 복용하고 있는 약)을 통역해주었다.


[뇌졸중의 위험인자에는 고혈압, 심방세동 등 심장병, 당뇨병,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 흡연, 비만 등이 있습니다.]


고혈압, 당뇨도 없었고 예전에 가끔 어지러운 적은 있었지만 지병 하나 없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뇌출혈 진단을 받은 것이다. 환자는 비만한 체격도 아니고 오히려 말랐다.


  [뇌졸중은 청년기(45세 이하)에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발생률은 낮지만, 뇌출혈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노인들처럼 고혈압, 당뇨 등 전통적인 위험인자들과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흔치 않은 발병 원인이 많고 다양하며, 원인을 찾기 힘든 경우도 꽤 있습니다.]


한양대병원에서는 수액 처치만 하였다고 하고 처방받아온 약도 없었다.


  [뇌출혈의 경우 수술을 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오히려 수술은 출혈이 소뇌 부위에 있어서 40ml 이상이거나 3cm 이상의 소뇌 출혈이 뇌줄기를 압박하는 등(이 경우에는 환자가 아예 말도 못 하고 눈도 뜨지 못하는 등 증상이 매우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에 실시합니다. 대신 혈압관리와 호흡이 잘 되는지, 열이 나지 않는지 등을 살펴볼 텐데, 이 환자의 경우 혈압이 적절하고, 다른 V/S(생체징후)이 적절하여 아마 별다른 약을 처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보통은 통증 관리를 위해 진통제나 항경련제를 처방받아오기는 합니다).]


문제는 통역사분이 나와 이야기를 끝내고 집에 가시면서 시작되었다. '안돼. 그럼 환자랑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지. 다음날 증상이 어떠한지 어떻게 물어볼까. 한약 치료도 들어갈 텐데 한약 먹고 불편한 점은 어떤지도 어떻게 물어볼까.'


사실 나는 영어 다음으로 그나마 나은 언어가 중국어였다. 나름 중국 드라마도 가끔 보고 HSK도 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어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다음날, 떨리는 마음으로 아주 간단한 중국어로 물어보았다.

"진티엔 션티 쩐머양? 토우통마?" (오늘 건강이 어떠세요? 두통이 있나요?)


환자는 중국어가 통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는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아니면 살짝 빠른 속도일 텐데 중국인이 아닌 나한테는 정말 쏼라쏼라-하는 것처럼 들린 것뿐일지도 모른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이 말을 못 알아듣는 데 있었다.

내가 물어볼 수는 있는데, 대답을 하면 그 대답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 반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실패한 것이다.


일단 침 치료를 시작하였다. 다행히 환자는 중국에서도 침을 맞아본 적이 있다고 침을 맞는 것은 괜찮다고 했다. 영어가 안 통해서 답답하기는 하였지만 그나마 중국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침을 처음 접하는 (예를 들면) 영국인, 이집트인이라면 겁을 먹고 왜 내 몸에 바늘을 찌르는지, 혹시 공격을 하는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침의 원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난감했을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한국인들도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풍 환자들한테 왜 침을 놓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침을 놓는다고 이미 뇌의 죽은 조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뇌의 일부분이 죽으면, 우리 몸은 신기하게도, 죽은 조직을 피해서 주변의 새로운 조직이 새롭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침 치료가 뇌에서 빨리 새로운 조직을 연결시키도록(뇌의 가소성을 높이도록) 합니다. 그래서 중풍 후 침 치료를 받은 환자군이 침 치료를 받지 않은 군에 비해서 회복이 더 빠르다는 연구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나 말고도 간호사 선생님도 라운딩(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환자한테 오늘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을 하니까 이 환자분은 아예 번역 어플을 설치하셨다. 그리고는 "머리가 아프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서 답답하다" 등이 화면에 나타났다.


며칠 뒤, 나는 환자분한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칭따오"(청도)라고 대답하셨고 나는 반사적으로 "칭따오 피지우?"(청도 맥주)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했던 질문과 대화(어디가 아프냐,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냐, 주로 언제 아프냐, 밤에도 아프냐 등)보다 이 대화 한 번이 환자와 나 사이의 크나큰 언어장벽을 허문 느낌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저 머나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생각과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듯했지만 이 이후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무언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 왔으니 많은 것들이 낯설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병원에 있는 것도 무서운데, 타국의 병실에 누워있는 것은 많이 힘든 일일 것이다. 거기에 평소 고혈압, 당뇨도 없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중풍이 와서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니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을까.

그러다가 비록 말은 잘 통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자신의 고향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답답한 와중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셨을 것이다. 비록 자신과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은 아니고, 언어도 유치원(아니면 갓난아기) 수준이지만 자신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안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크나큰 안도감을 느끼게 되셨나 보다. 그 뒤로, 자신의 증상을 말하거나 번역기로 보여줄 때도 얼굴이 편해 보이고, 내가 못 알아듣는 표정을 보일 때도 답답해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번역기를 시도하셨다.


때로는 중요한 것은 마음이 통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 경험이었다. 말이 안 통해도, 마음이 통하면 환자의 치료 순응도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 환자가 가족력이 어떻게 되는지, 예전에 수술한 적이 있는지,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는지 등도 중요하지만 이따금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와 마음이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환자가 의사가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줄 때 더 자신의 마음을 열고 치료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도 환자분은 한 달 정도 넘게 침 치료와 한약 치료, 재활치료를 받으시고 퇴원하셨다. 입원 당시에는 두통과 어지럼증을 많이 호소하셨는데, 치료받으시면서 빈도 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더 이상 머리 아프고 어지러운 증상이 없다고 하셨고, 한쪽 팔과 다리는 움직이지 못하셨는데 이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청년기에 발생한 뇌졸중은 노인환자들의 뇌졸중보다 일반적으로 회복이 빠르고, 더 좋은 편입니다.] 더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 칭다오로 다시 가시겠구나.."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고향 칭따오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시고 있기를 바란다.



[출처 : 나의 경험 +

 뇌졸중, 대한뇌졸중학회, 범문에듀케이션, 2015년

중풍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대한중풍순환신경학회, 2021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