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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2. 2022

BC 2500, 기후변화와 신시의 폐쇄 그리고 단군왕검

한민족의 시작

BC 2500년 경, 기후변화가 생겼다. 몇 년 동안 계속 겨울이 이어진 것이다. 바이칼에 갈 수가 없었다. 바이칼에 있던 한린 사람들이 모두 사망했다. 이는 제천행사에 관한 많은 기억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아느 지식 역시 잃어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바이칼에서는 식량을 아끼고 아껴도 7개월이 한계다. 하지만 몇 년 간 고립되었음에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세찬 추위인지 바이칼로 식량을 가져갈 수 없었다.     




한린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는 운 좋게 아사달에 여행을 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한웅이 신시를 떠날 때 함께 나서길 거부했던 사람들의 후계인 터라 한린 사람들은 신시 밖을 나서질 않았다. 이에 많은 수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중계지였던 아사달이 새로워 져야 했다. 아사달의 인구가 늘어났고, 아사달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록 아사달이 약간 높은 구릉에 위치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넓은 평야를 배경으로 한다. 외부로 부터의 공격을 방어할 만한 지형은 아니었다. 이에 적합한 땅을 찾아야 했다.      



         

무엇보다 아사한의 체제에 변화가 필요했다. 더 이상 제정분리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에 한웅에서 단군으로의 체제 변경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군은 단군왕검으로 그는 순혈 사흐 중에서 선정되었다. 그리고 단군왕검의 성은 한씨였다.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안전할 만한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새로운 거주지를 찾고, 기반 인프라를 깔고 성을 쌓는데 대략 17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새로 찾은 왕검성은 대략 2000년 간은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할 것이라 판단했다.               




한편 살아남은 순혈들은 더 남쪽으로 가는 선택을 했다. 마한 입장에선 지도자급이 유입된 것이다. 서해의 침몰 이후 한반도, 산둥반도 등지에 살아남은 마한 사람들 중에는 지도자들이 없었다. 이에 바이칼에서 온 사흐나 마그들은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사흐나 마그들을은 뭉쳐 있는 걸 싫어한다. 이들은 마한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결과적으로 생존만 하던 마한이 이제 유물을 남길 수 있는 마한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수 많은 마한국들이 만들어진 계기다.               




기원전 2333년, 왕검성이 완성되었다. 이와 동시 고조선이 출범했다. 왕검성은 지금의 랴오둥반도의 끝자락에 건설되었다. 사방이 뚫려있어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아사달을 버리고 육로로는 북쪽에서의 공격만 막으면 되는 랴오둥반도의 끝으로 수도를 정했다. 기원전 2300년 당시, 해상을 통한 공격을 우려하기엔 조선 기술이 너무나 빈약했다.                             





남쪽 삼면이 바다고 육지로 이어진 북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산맥의 한쪽에 산성을 세웠다. 이 군사성이 바로 왕험성이다. 왕험성은 최대 인원 2만명 수준의 작은 성이었으며, 내부에서 자립할 정도가 못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왕험성을 왕검성으로 착각하고 있다. 전혀 아니다.             



  

왕험성의 남쪽 40~50km 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건축되었다. 산과 평지가 만나는 곳에 절벽 같은 산을 등지고 성이 세워졌다. 최대 <70만 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거대한 성으로서 가로세로 300m 규모인 제단을 충분히 보관할 여유 공간이 있는 정도였다.          




10년 마다 열리는 제천행사는 정해진 자리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아사달이긴 하나 별자리와 기운 등에 따라 제단의 설치 장소는 이동되었다.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제단은 가로세로 60m 정도이나 당시 사용되었던 제단 중 큰 것은 300m 에 육박한다. 제단은 단층이 아니다. 피라미드처럼 생겼다. 가장 아랫편의 규모가 가로세로 300m 정도이니 그 높이는 수 십 미터에 다다랐다. 사용을 마친 제단은 분해하여 안전한 곳으로 이동 시켰다. 왕검성이 만들어진 이후엔 왕검성에서 보관했다.       



        

그런데 이 거리가 결코 짧지가 않다. 아사달과 왕검성의 거리는 부산-서울 거리의 1.5배 정도다. 제단은 결국 값비싼 바위와 갖가지 색상과 크기의 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엄청난 무게다. 이동 중 깨지는 것을 막아야 했는데 다들 덩치도 장난이 아니다. 이것들을 매 십년 마다 마차에 싣고 가지고 가서 설치한 뒤, 다시 가지고 오는 일을 반복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 고조선의 물류 및 교통시스템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왕검성의 성벽과 내부성은 돌을 이용해 지어졌으며, 사용된 돌의 결합구조는 세계 다른 곳과 차별성을 갖는다. 세계4대 문명 중 3개 문명,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은 고조선과 교류했던 곳들로서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문명이 없던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더스 문명을 제외한 나머지 왕검성,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거대한 피라미드 양식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아느의 여신, 기가 거주했던 기의 신전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양식이란 공통점이 있으나 왕검성의 돌은 특별한 방법으로 결합을 했다. 쇠를 사용해 돌과 돌을 연결한 것이다. 그냥 벽돌처럼 생긴 돌에다 홈을 판 다음 쐬기를 박았다. 더구나 그 쇠의 재질과 형상은 표준화 되었다. 반면 이후 고구려는 쇠를 사용하는 기술을 전수 받지 못했다. 고구려는 돌의 형태를 다듬음으로 돌들을 쌓는 식이였다. 돌을 치아처럼 한쪽은 작고 바깥은 큰 형태를 만들었다. 겉에서 보면 그냥 사각형이나 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구조다. 그러나 돌들을 쇠로 결합시키진 못했다.      



    

고조선에서 사용한 쇠를 이용한 돌의 결합 구조는 세계 문명사 중 가장 우수한 양식이다. 이후 왕검성을 찾았을 때 돌에 구멍과 홈이 파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면 된다. 비록 쇠는 녹슬어 사라졌을 수 있지만 돌의 구멍은 그대로 일 것이다. 무엇보다 구멍의 크기가 일정하다란 점이 더욱 놀라운 점이다.      

또한 다른 점은 고조선은 땅에 지줏대를 박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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