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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3. 2022

BC 2300, 세상의 중심이던 아시아의 로마, 고조선

한민족의 시작


고조선은 아시아의 로마였다. 고조선은 3가지 기반을 가졌다.  

    

첫째, 공업화된 청동기 생산국이었다.      

둘째, 북부무역로를 운영했다.      

셋째, 제천행사의 주최국이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은 이를 통해 부를 창출하며 동아시아의 천자국, 주신국으로서 2천년간의 지위를 누렸다.          


고조선의 부는 무역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후기 초원길이라 불리는 북방교역로를 통해 대륙 반대편 영국의 아연까지 수입함으로 상당히 우수한 청동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켈트와의 네트워크는 서로가 아느를 떠난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고조선이 무너진 기원전 108년까지 1만년 가량 이어짐으로 서로를 부강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조선은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앞서의 3가지 기반에 앞서 먼저 고조선의 군대를 짚는다.          



고조선의 군대는 귀족 군대였다. 고조선은 해당 지역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던 체제였다. 고조선은 마차부대를 운용했다. 우산 달린 마차타고 화살 쏘는 마차부대였다. 개마고원에서 키운 말과 기병이 활동한 것으로 우산을 씌운 마차를 말 두 마리, 네 마리, 여섯 마리 끄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두 마리 마차의 경우 달리면서 쇠뇌를 쏠 수 있었고, 네 마리 마차의 경우 전후좌우로 쇠뇌를 날릴 수 있었다. 쇠뇌는 어른 엄지 손가락 보다 굵었고 옻칠이 되어 있어서 몸을 관통해 버렸다. 쇠뇌 한발에 다섯 명까지 죽일 수 있었다. 이러한 마차들이 몇 천 대, 가장 많은 때는 2만대가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고조선 마차

            

고조선의 마차는 표준화 산업화 되어 있었다. 마구를 사용하는 도구는 전부 기계식 조립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냥 목재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다. 청동으로 된 부속품이 있고, 규격화된 나무를 끼우면 마차가 완성되는 형식이었다. 어디서든 마차가 부서지면 그 부속을 끼우면 수리가 완료된다. 도로 또한 마차 폭에 맞춰 정비되었다. 발굴된 부속품들을 보면 규격화되어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고조선 마차



        

고조선은 전국이 마찻길로 연결되었다. 당연히 전국에 도로망이 깔려있었다. 무엇보다 고조선의 영토는 험악한 산맥이 있는 한반도가 아니었다. 랴오닝반도와 만주 평야가 고조선의 땅이다. 넓디 넓은 평지에서 도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8마리, 16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통나무 바퀴가 달린 도로개설차가 내달리면 도로가 만들어 지는 것이었다. 마차를 통한 왕래가 많았기에 도로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조선 시대 때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고조선 사람들은 삽살개와 설표를 데리고 다녔다. 둘은 마차를 따라 뛰어오기도 했으나 삽살이는 마차 짐칸에 탔으며 설표는 마치 지붕에 엎으려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호랑이의 전투력이 100이라고 한다면 삽살이는 60, 설표는 70 정도 였다. 하지만 설표는 호랑이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가린 털 때문에 보이는 게 없어서인지, 삽살이는 가릴 게 없었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누구보다 앞에 나서서 호랑이를 공격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설표는 삽살이를 도와야 했다. 둘이 덤벼도 호랑이를 잡을 순 없었지만 내쫓을 순 있었고, 가끔 늙거나 어린 호랑이의 경우 오히려 이 둘에게 잡히기도 했다. 삽살이는 일제 시대 왜놈들에게 많이 잡혔으나 아직 남아있는 게 있지만 설표는 어느 샌가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히말라야산맥에 가서야 만날 수 있다. 고조선 당시 마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는 상인들은 비슷하게 태어난 어린 삽살이와 설표를 분양받는 것은 필수적인 코스였다.        



      

설표,      cafe.naver.com/vertebratefight/9794

          

                     





이게 고조선의 기본 문화였다. 이걸 중국이 배워갔다. 그리고 자기들이 기원이라고 한다.  



  


한편 고조선에 그렇게 많던 마차가 조선시대에는 없었다. 이에 세종대왕은 마차를 부활코자 하셨으나 문제는 길이 없는 것이었다. 길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 고조선의 규격화된 도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는 것도 조선의 재정상 불가능했다. 이에 세종대왕은 궁여지책으로 가마에 바퀴를 달았다. ‘남여’라는 가마에 바퀴를 부착해 ‘초헌’을 만들어 이용하게 했다.  무엇보다 세종대왕은 고조선의 모습을 많이 아셨고 이를 발전시키는 건 커녕 엄청나게 낙후해 버린 조선을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그러나 세종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을 구슬려서 여러가지를 회복시켰을 따름이다.    



       

남여, 초혼


조선 세종 당시 개발된 초혼

         




무엇보다 고조선 초기에는 만주가 옥토였다. 또한 우수한 농업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 때 만주는 그냥 초지였다. 고조선 때는 기후가 좋지 못해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업기술이 있었는데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농사 기술이 퇴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조선은 하늘의 뜻을 살피고 돈도 많고 식량도 많고 사람도 많고 따르는 이도 많고 과학자도 많고 현자도 많은 사회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거대한 건축물도 있었다. 고조선은 되게 풍요로운 사회였다.          




한편 고조선의 마차는 북방교역로 뿐만 아니라 낙양 인근의 상에도 갔으며, 중국  남서쪽 삼성태까지도 이어졌다.      




상나라, 고조선, 삼성태는 서로 무역을 했었다.     



삼성태 문화는 묘족의 것이었다. 지금 미얀마나 베트남에 있는 이들 중에 우리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묘족이다. 삼성태가 망하고 오나라 월나라를 세웠다가 또 망하고 남조, 대리국이 망하고 미얀마로 들어갔다. 일부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제나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들은 코와 입술의 너비가 비슷하다는 특징이 있다. 삼묘족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높은 건물 쌓는 거랑 광산 개발하는 것이야. 삼묘족들은 기원전 3000년대, 15층 건물 세웠을 정도이다.     




     

한인, 한웅, 단군시대는 모두 농경사회였다.      




한인 사회는 중심은 농경했지만 많은 사람은 수렵채집을 했다. 왜냐면 정착을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호수가 많았다. 이에 어로를 하면서 과일을 많이 키우면서 농경을 했던 게 한인 사회이다. 바이칼로 이동한 후에도 바이칼 섬 중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선 농경을 했다. 다만 한린 사람들 전체를 먹일 만큼의 농산물을 수확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한인 때는 거대한 새 게브를 이용했다. 다만 바이칼 도착할 무렵엔 더 이상 게브는 없었다.     





한웅 사회 역시 바이칼의 농경을 계속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목을 했었다. 한웅은 동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키들을 처단했던 시대였다. 한웅 때부터 말을 이용했다.     





단군 사회는 정착 문명이다. 정착해서 농경을 했던 게 단군 사회다. 그래서 동물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가축화가 진행된 것이다. 어짜피 설표와 삽살이는 데려온 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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