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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1. 2022

BC 3000, 황제헌원, 염제신농 그리고 치우천왕

한민족의 시작

몇 백 년이 지났다. 그리고 헌원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헌원은 버림받은 어린애였다.    


 

그런데 당시 아사달에는 릴이 되고자 했던 후보가 있었다. 그는 곱추였고 성격이 편협했다. 더구나 남색을 했기에 아사달에서 쫓겨났고 말았다. 쫓겨난 곱추는 황토고원으로 갔고 거기서도 쫓겨났다. 처음엔 아사달에서 왔다고 하니 모셔졌는데 모셔놓고 보니 이상한 놈이었던 것이다.


     

뭐 곱추 입장에서도 황토족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아사달에서는 깨끗한 집에 청결한 주거환경, 건강한 먹을 것을 누렸는데 회화족의 돼지우리 같은 집, 이불도 없고 씻지도 않고 먹을 거라곤 튀긴 것 밖에 없는 그곳을 견디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회화족은 땅을 파고 땅 아래에서 살았다.     



황토고원에서도 쫓겨난 곱추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아이를 발견했다. 너 내 따라 갈래? 그 아이를 자기 남색용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서 맨날 강간 했다. 근데 그 대신에 자기가 아는 지식을 전수했다. 그가 헌원이다.         


 

한편 이 곱추는 진법을 알고 있었다. 릴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헌원을 서왕궁에 넣을 수 있었다. 자기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헌원은 서왕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곱추한테 배웠던 상태이다. 그래서 서왕궁에서 예쁨 받고 서왕모의 가르침을 받았다. 결국 헌원은 황제씨가 되었다. 황제씨가 이제 회화족의 왕이 된 것이다.        


   

여기서 황제는 성이고 헌원이 이름이다. 이후 중국에선 황제라는 성을 그냥 직위로 고정시켜 버렸다. 그리고 황제헌원을 헌원씨라 부르고 있다. 우리 기준으론 당황스럽다.       


   

되돌아 보면 처음에 여와가 신혼여행을 안 갔더라면, 여와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리고 복희가 서왕궁을 안 만들었다면 과연 중국은 어찌 되었을까? 동시에 우리 역사는 어떠했을까?       


        

그 이전에 동쪽에는 염제 신농이 있었다. 신농은 산둥반도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마간을 찾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신농은 회화족이 아니다. 그는 특이한 존재였다. 마그 이면서 사흐 였기 때문이다. 몇 백 년 또는 몇 천 년에 한 번, 그런 이가 나타났다. 알다시피 그는 그 이전까지 내려오던 각종 약초에 관한 지식을 직접 확인해가며 집대성했다. 하지만 그가 찾던 궁극의 목표는 바로 수몰된 마간을 찾는 것이었다.    


      

잠깐 마그와 사흐를 짚으면 마그는 5이며 사흐는 6이다. 아느의 사람들은 4이며 하늘님을 뵙지 못한 사람들은 3이다. 아느의 사람들 중에서도 구분이 생기는데, 마그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자들을 마기라 하며 이들은 4.5이다. 사흐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남자들을 릴이라 하며 이들이 4.6이다. 하지만 5와 6은 높고 낮음의 차이가 아니라 방향성이 다른 것이다. 마그는 과학자이며 사흐는 산신령이다. 마그와 사흐는 이과와 문과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마그이면서 사흐 였던 염제 신농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단 사흐는 만물에 존재하는 결을 살피는 자들이다. 신농이 말하길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결이 있고, 먹을 수 없는 식물은 결의 막힘이 있다.”고 했다. 이에 결을 살피면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농이 치우보다 + 30살 정도고, 치우가 황제보다 대략 + 50살 정도다. 황제가 태어났을 때 치우는 50살이고 신농씨는 80살 무렵이었다.            


   

신농씨는 150살 정도 살았다. 신농씨가 첫 애를 낳았던 게 오십대 이었고, 팔십대에 다섯째를 낳았다. 신농씨에게 80살 정도의 의미는, 한창 신혼생활 즐기던 때이다. 알다시피 신농은 염제라고 불리며 중국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신농 역시 아느의 후예다. 여와, 복희도 우리 민족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세종대왕도 이순신도 김연아도 모두 자기들 민족이라 한다. 다시금 천년이 지나면 세종대왕과 연개소문, 이순신이 중국의 신으로 추앙받을지 모를 일이다. 잘 지켜야 할 터이다.          




이 모든 게 기원전 300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뭐 몇 백 년 정도 걸린 일이긴 하나 대충 기원전 3000년 경 있었던 일이다.          




한편 회화족의 동진과 이로 인한 아느계 사람들의 피해를 우려한 한웅은 산둥반도에 군사를 파견했다. 이미 서해안이 생기면서 산둥반도에 머물게 된 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을단위 생존을 하던 사람들이라 웅족과의 결합을 통해 전투집단이 된 배달과는 차원이 달랐다.           



    

치우는 산둥에 자리잡은 군사령관이었고 이들 집안이 치우씨였다. 그리고 그 땐 치우천황이라 안 불렀다. 그냥 ‘치우기’라고 불렀다. 치우기. 지금도 깃발은 리더의 의미이다. 그 때는 군사령관 치우의 무리들을 전부 다 치우기라고 했다.     



     

황제가 스무 몇 살일 때 전쟁을 시작했고 당시 치우는 칠십 몇 살 정도였다. 칠십 대일 때 황제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는 백번 싸웠다고 되어 있다. 실제는 99번 이기고 단 한 번 졌다.     

     




근데 처음으로 패배한 다음 치우는 죽어버렸다. 노환으로 죽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십 번의 싸움 동안 치우 일족의 사람들이 대부분 죽게 되었다. 치우 자손들이 모두 죽어서 새롭게 치우를 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역사 속에 치우는 81명이다. 당시 치우씨들 중에서 나온 장군이 81명이었다. 근데 다 죽었다. 90번 넘는 전쟁들 중에, 한 전쟁에 한명만 죽는다 해도 피해는 처참할 수 밖에 없었다. 민간에 치우의 피를 이은 이가 있긴 했는데 얘는 반푼이었다. 바보였다. 그래서 얘는 치우의 일가를 이어갈 재목이 못되었다.     



     

치우기는 청구국 관련 이야기다. 국가도 아니었고, 청구라는 말 자체가 푸른 언덕이란 뜻의 중국이 불렀던 명칭이기도 하다. 당시 대륙에서 보기에 산둥반도의 입구는 거대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너무나 울창했기에 이 숲은 마치 방벽 같았다. 엄청난 숲을 지나야만 산둥반도에 접어들 수 있었다. 마한이 수몰될 당시 서쪽으로 피했던 이들 중 많은 이가 산둥반도에 정착했던 것이다. 회화족들은 산둥반도를 청구라 했었고, 당시 청구는 치우의 땅이었다. 기원전 3천년경 일이다.               




환단고기에서 배달의 환웅 중에서 자오지 환웅이 있는데 이를 치우다 라고 적어놨다. 그런데 전혀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완벽하게 잘못 적은 것이다.               



자오지 환웅은 아직 바이칼에 위치하고 있었고, 치우는 산둥에 있었다. 기원전 3000년대는 아직 배달의 중심은 바이칼북쪽이다. 만주, 아사달과 산둥반도는 배달의 영향권이지 중심은 신시이다. 자오지 환웅과 치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청구국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번이었다. 중국의 번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번이었다. 번은 변경에 있는 군사세력을 뜻한다. 청구국은 한반도와 산둥반도 끝에 있는 마한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둥반도의 서쪽에 설치된 군사세력이다. 치우는 청구에 잇는 군사령관이었던 것이다. 군사령관은 세습이었고, 치우씨 중 군사령관을 이어받았다.     



치우는 성이다. 치우기, 치우순, 치우선 등으로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자오지 환웅과 치우는 전혀 관계없다.          



나중에 고조선이 만들면서 좀 더 서쪽으로 번을 옮겼다. 바로 그게 ‘상’이다. 기원전 3000년 경에는 아직 대습지가 존재하던 터, 청구 만으로도 회화족의 동진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 경, 습지가 사라지면서 청구와 부여가 결합한 ‘상’을 세워야 했다. 상은 고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서쪽 변방에 설치한 ‘번’이었다. 하지만 상을 지금은 ‘은’이라 부르고 있다. 발견된 지역이 ‘은허라 그렇다. 당황스럽다.        


  

당시 중국의 남서부 일대에 파족의 삼성태가 있었는데, 청구와 삼성태는 해안선을 따라 교류했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습지는 베트남 인근에서는 약해졌기에 중국의 동부해안을 따라서 삼성태까지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치우는 북쪽으로 환웅과 교류했으며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교류를 했었다. 산둥반도는 중국의 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영토로서 오랫동안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랬다가 기원전, 고조선이 무너지면서 산둥이 제나라가 된다. 이게 680년이 되어서 고구려가 망하고 몇 년 지나서 치천국이 생겼다. 그리고 치천국은 백 몇 년 정도 유지되었다. 이후 치천국은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망했었다. 신라가 한 짓 중 가장 나쁜 일 중에 하나가 당을 도와 치천국을 공격한 일이다. 또한 발해가 이를 막지 않았던 점 또한 역사에 지은 죄가 크다. 발해는 제대로 된 나라라 칭할 수 없다.       


   

나라는 바뀌었지만 산둥의 사람들은 치우를 계속 전쟁의 신으로 숭배했다. 치우는 우리 민족의 신으로 모셔졌다. 치우를 중국의 신으로 모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치우기라는 게 있다. 치우의 묘에서 약간 붉은 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전쟁이 나고 있다. 치우가 돌아가신 게 몇 천 년 전이긴 한데, 지금도 전쟁이 날 때면 치우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지는 것이다.                    




한편 붉은악마에서 사용한 치우의 도안은 신라 귀면와를 토대로 한 것이라 치우와 관련 없다는 평이 있다. 이를 짚고 넘어가면, 탁록대전 당시 치우가 썼던 가면에 의해 두 개의 뿔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수련을 하던 릴들이 한반도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민가에서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곤 소원을 들어 주기도 했다. 하룻밤 만에 집을 지어 준다던가, 금덩어리를 갖다 준다던가 하는 식이다. 릴들은 산신령이 되기 직전의 사람들이라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소문이 합쳐지면서 ‘도깨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붉은악마가 신라 귀면와를 참조해다는 비평은 의미 없다. 해당 귀면와가 구전되는 치우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02년 우리가 붉은 악마로 치우를 모실 때, 중국은 반응했었는가?           


         

주은래라는 사람이 있다. 중국을 만든 이는 2명이다. 마오쩌둥은 정치, 군사를 담당했다면 행정, 외교, 문화를 담당한 것은 주은래이다. 중국인의 먹거리를 해결한 사람이 주은래이며, 지금의 인민대회를 만든 이도 주은래이다.                    



주은래는 유학파이나 마오쩌둥은 선동꾼이며 학벌도 없는 자였다. 1970년대 주은래가 고구려, 고조선, 치우는 모두 한국의 역사다라고 공식적으로 표고를 했다. 그래서 중국은 이를 법칙으로 지켰었다. 그랬다가 2003년 정권을 잡은 시진핑이 모든 것은 중국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은 그 이전이니 우리가 치우를 모델로 붉은 악마를 외쳤으나 중국은 무덤덤하게 ‘한국인들이 한민족의 신을 활용하는 것이다’ 라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고도 10년간 장쩌민과 싸우느라 딴 소리 없었다. 하지만 장쩌민을 물리친 이후 2013년부터 동북공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시진핑의 공식 임기는 내년, 2022년까지다. 시진핑은 계속 더 해먹겠다 라고 하고 있는데, 심장수술을 한 시진핑이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 시진핑을 추종하는 애들이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대혁명 때, 야, 마오쩌뚱 그러면 안돼 라고 말했던 주은래는 등소평과 같이 쫓겨났다. 마오쩌뚱 죽은 이후, 중국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주은래 밖에 없다 라고 해서 다시 그를 모셨다. 다시 권력을 잡은 주은래는 등소평이 괜찮다라고 했고, 등소평에게 권력을 줬다. 그런 후 주은래는 늙어서 죽었다.     


                

중국인들이 진짜 마음으로 울었던 사람이 주은래였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위인은 장개석의 스승인 쑨원과 주은래이다. 이에 ‘주은래가 고구려는 한국의 것이다 라고 했는데 지금 너희들은 왜 그러냐’ 라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당황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 위치는 선을 긋는 게 아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도 없고, 또 38선처럼 철망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국경은 틀릴 수 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당시에도 명확한 국경이 없었는데 지금의 역사서에서 국경선을 분명히 나타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이다.          



특히나 고구려는 속국 개념으로 영향력을 펼쳤다. 예를 들어 거란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거란도 고구려의 영토 안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당시 거란이 중국 편을 든 것은 반란을 저지른 것 뿐이다. 근데 마치 거란 따로 있고, 고구려 따로 있는 것처럼 표기하는 지금의 국사책은 틀리다. 거란은 겨우 삼십만 명 밖에 안 되는 조그만한 것인데 지금은 거란의 영토를 매우 크게 표시하고 있다. 과거의 경계는 그냥 진한 색과 옅은 색과 같이 색의 농도나 빗금을 치는 것처럼 영역을 나타내는 게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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