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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25. 2022

BC 1300, 아사달 왕검성 폭파, 단군피습

한민족의 시작


처음부터 왕검성이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아사달에 도읍을 했다. 기원전 2400년 전후다.     


단군의 아들이 왕검성 건축의 총감독이었다. 왕검성 공사에 70~80년 정도 걸린다. 그래서 기원전 2333년 왕검성이 완공된 것이다.      


그 이후 공업지대를 건축하면서 왕험성 건축이 시작되었다. 왕험성 완공까지 약 150년 정도 걸렸다.          




첫 번째 단군의 이름은 왕검이었다. 단군왕검, 그랬기에 왕검성이라고 이름 정해졌던 것이었다. 단군은 임금, 황제처럼 직위를 표현하는 단어로 천자를 뜻하는 직위였다. 단군 왕검의 성은 한씨이며 본명은 왕검이었다. 그러나 발음은 지금과 다르다. 당시에는 치음, 설음, 후음을 두루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발음을 한자로 표현하다보니 왕검이라 적은 것 뿐이다.           



두 번째 단군은 단군부루이셨고 단군왕검의 아들이셨다. 왕검성을 지으신 분이다.      

왕검성은 기원전 2200년대 전쟁을 대비하고자 만들었던 것인데, 막상 2200년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물론 이때는 부루 이후의 단군이 맡고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제천의식은 여전히 아사달에서 진행되었다. 제단은 평소에는 왕검성에 보관하고 행사가 있을 때는 아사달로 이동했다. 2200년 대계가 실패했지만 고조선의 체제는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300년대 아사달에 큰 폭발이 있었다. 당시 단군은 삼랑(세 명의 아들)을 데리고 마한으로 순례를 가셨을 때이다.



당시 아사달에는 매우 큰 회의가 열렸었다. 회의 주제는 새로운 단군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삼랑의 자질이 부족했기에 새로운 단군을 선출하고자 했던 것으로서 회의의 중립성을 헤치지 않기 위해 단군은 삼랑을 데리고 마한으로 순례를 떠나셨던 것이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사흐들께서 아사달에 모이셨고 회의를 하는 상황 대폭발이 발생했다.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흐들과 마그들이 목숨을 단명한 대사건이다.           



어쩌면 운석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유사 핵폭발이 있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지난 4천년 간 그 어느 때보다 우수한 분석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 홍산문명의 발굴 흔적에서 고온에 용융되었던 흔적을 찾고, 그 폭발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같은 시간 마한을 순례하던 단군께서도 테러를 당했다. 아사달을 공격한 무리와 같은 무리인지는 모르나 단군은 공격을 당했고 급히 치명상을 입은 채 황해도의 구월산에 있는 사흐에게 피신을 했다. 하지만 단군은 돌아가셨다. 그래서 삼랑이 돌아가지 않고 마니산에 봉수대를 쌓았다. 정보수집을 위해 강화도 마니산에 봉수대를 쌓은 것이다.      



만약 왕검성이 만주나 평양에 있으면 강화도에 봉수대를 쌓을 필요가 있는가? 랴오닝성 끝자락에 왕검성이 있었기에 가로막는 것이 없는 서해안 강화도 마니산에서는 큰 연기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수대는 엄청나게 커야 했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매우 큰 연기를 피울 수 있어야 했다.      



세 명이 머물 수 있는 공간 역시 필요했다. 이에 마니산에 작은 궁궐을 짓기까지 했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이 마니산 천제단만 있을 뿐이다. 지금의 천제단은 규모가 볼품없다. 무려 3300년 정도 지난 건데 이정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다. 지금 현재 도시가 버려진다면 100년만 지나도 볼품없을 것이다. 조선 말 강화도 성 쌓을 때도 이 돌 가져다 썼고, 원나라 침략 받았을 때도 이 돌 뽑아 썼다. 이 정도 남아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마한 입장에서 명색이 고조선 삼랑의 거처인데 이를 허술하게 지을 순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혼란기가 있었고 실력자로 떠오른 게 부여였다. 당시에는 부여가 있었지 북부여가 있는 게 아니다. 부여 혼자 뿐인데 왜 북부여가 나오나. 바로 이 것이 환단고기가 크게 잘못한 것 중 하나다. 북부여라고 따로 움직인 건 나중 일이다.     



그렇게 혼란기를 정리 못하는 사이 이삼백년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상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졌다. 통제력이 약화되니깐 상에 가 있던 사람들이 방탕해 지기 시작한 거다. 이미 이들이 있던 위치가 위치인터라 회화족과의 혼혈이 생겼고, 초자아적인 통제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늘이 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상은 주변관리가 약해졌다. 중국 회화족이 들고 일어났고 주나라가 나타난 거다. 주나라는 기원전 1064년인가 그 근처에 시작했다. 전기 주가 있고 후기 주가 있다. 후기 주가 기원전 700년대이다.     



주문왕은 기원전 1100년 대 아사달에 와서 공부를 했다. 기원전 1300년대 아사달에 그런 일이 생기니까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사라졌다. 그래서 문호를 개방했다. 다른 이민족 또는 다른 데에 가 있는 아느의 후예들은 와서 배울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이 때 아사달은 홍산 문명의 아사달이 아닌 부여의 땅으로 옮겨졌다.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이렇게 하니깐 몽고 계통에서도 오고 선비 계통에서도 오고 사방에서 온 거다. 주 문왕도 그 학생 중 한명이다.      



공부를 마친 주문왕이 돌아가던 중 황하강을 건너가 벽에 적혀진 하도낙서이다. 이를 토대로 공부해서 만든 게 주역이다. 하도낙서는 청나라 때까지 유지되다가 태평교도의 난 때 사라졌다.     



상나라가 망하면서 그곳 귀족인 부여계 사람들이 되돌아 왔다. 돌아와 보니 되게 혼란기였고, 이들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기원전후 시대의 위만조선과는 1000년 정도 시간 격차가 있는 일이다. 지금은 기원전 1000년 경 이야기다. 상의 왕족들은 돌아오지 않고 수기 백제, 기자는 지금의 북경지대에서 머물다 갔고, 귀족들이나 백성들은 돌아왔다. 문제는 이 사람들은 권력에 젖은 사람들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권력 쟁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게 아사달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본격적인 부여 계통의 단군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원전 2400년에서 기원전 1300년까지는 한씨가 단군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3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때 까지는 유능한 사람이 단군이었다. 사흐 중에서 한 명씩 뽑았다. 뛰어난 사흐가 단군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상나라 사람들이 돌아오고 권력쟁투가 시작되면서 단군에 대한 것을 패권자, 군사력이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단군을 맞는 걸로 바뀌어 버렸다. 이에 기원전 1000년부터 부여계 단군이 시작된 것이다. 부여계 단군들 중에 단씨가 있는 거였다.     



丹 붉을 단, 정성스러울 란, 정성스러울 난     



단이란 말이 나무가 들어가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신령스런 생명수의 나무를 숭배했기 때문에 성에 나무 목이 들어가 있다. 朴(박)씨 역시 그 쪽에서 온 사람들의 후예다. 물론 신라 계통에도 박씨가 있다.     



그런데 그냥 북만주, 항카호 인근에 있던 부여사람들은 순혈의 부여다. 하지만 상의 부여 사람들은 몇 백년간 혼혈이 되었기에 순혈 부여와는 외모와 습성이 달랐다. 근데 이들이 들어오며 정치권력을 잡게 되면서 정치적인 조직으로서 부여가 등장하게 되었다.      



기존의 고조선은 제천행사를 통한 통치가 가능했다. 앞으로 10년간의 기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건 절대적인 권력이었다.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부여인들은 애초의 제천행사를 할 수 없었다. 정치적 부여가 나타나면서 무기를 통한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곳곳에서 청동제 무기들이 발굴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무장시켜서 지방에 군사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파형동검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게 이 때 일이다. 지금 사람들이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부터 이다 라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완벽한 착각의 이유이다.     



한반도 청동기가 기원전 1000년경에 가장 왕성했다 라는 말의 의미는 사방에서 군사적 활동을 했다 라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경찰로서의 무기가 불필요 했는데 이제는 무기를 통한 통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개마국의 활동과 기원전 1000년대 부여단군의 무력 통치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개마고원 세력은 원래부터 있었다. 개마의 주 생산품은 말이었다. 그 전에는 그냥 말 목장이었다. 기원전 1000년부터 군사용 말, 군마를 키우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지. 청동개갑이 시작된 거다.           



쇠뇌를 사용하는 마차병들은 이미 고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터이다. 왕검성의 주병력이 마차병이었던 것이다. 이 때의 말은 준마이다. 준마는 지구력이 강한 말로써 어깨가 튼튼하여 무엇을 짊어지는 능력이 뛰어났다. 마차를 끄는 말이 준마다. 돌파력, 돌진력이 강한 말은 군마로써 활약했다. 기원전 2400년 경 고조선 성립 후 왕검성이 축조되면서 개마에서는 준마가 키워졌다. 그리고 이 말들은 마차병의 일원이 되었다. 고조선의 주무기는 쇠뇌를 장착한 마차였고 이 마차를 끄는 준마는 어깨가 튼튼하고 지구력이 우수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기원전 1000년부터 청동개갑을 씌운 군마가 사용되었다. 군마는 돌파력, 돌진력이 강한 말로써 개마의 역할이 시대에 따른 변화되었다.           



한편 기원전 1000년 대에는 왕검성은 없었다. 기원전 1400년에서 기원전 900년 사이 왕검성이 사라졌다. 좀 더 범위를 좁히면 기원전 13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 기간에 왕검성이 수몰되었다. 아사달 폭발과 같은 때일 수도 있고, 또는 일이백년 이후 수몰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사달의 폭발과 왕검성의 수몰이 자연에 의한 우연적인 재해로 치부하기는 힘들다.      



기본적으로 자연이 아느의 후예들의 땅을 침범할 가능성은 극도로 적다. 그렇다면 마간은 자연적으로 수몰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가? 모른다. 왜 마간이 바닷 속에 사라져야 하는지 모른다.     


더구나 왕검성 하부에는 수중동굴이 있는 지반이다. 거긴 화강암 지대가 아니다. 왕검성은 기름과 천연가스가 나는 지역이었다. 한순간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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