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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30. 2022

BC 2500, 부여에 대해

한민족의 시작

호수가 있었다.



카스피해의 동서로 살고 있던 이가 켈트와 부여다.



그 아래 태초의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 근처에 있던 이들이 아니가 되었다.



부여족은 아니와의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

기원전 1만년 아느가 사라진 이후에도 켈트와 부여간 교류는 지속되었다.




부여가 아느의 방계였고, 켈트는 부여의 방계였다.

그리고 이 둘은 유목민족 이었다.



부여는 아느가 있을 때, 기원전 1.3만년에서 기원전 8천년 사이 교류한 사람들이고,

켈트는 기원전 8천년에서 기원전 3천년 사이 부여와 교류한 것이다.





아느가 있을 당시 아느 사람들은 주변을 여행했다. 부여는 린에 의해 지식이 전수되던 곳이 었고, 아느가 침략 당한 후 부여는 린을 중심으로 사회가 계승되었다. 동시에 아느에서 피난 온 아니들을 수용했고, 또 잠시 아느의 물건을 보관했다.




그렇게 부여는 아느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시키는 부여를 무시했다. 시키 기준에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는 아니 뿐이기 때문에 아니를 제외한 종족에 대해선 무자비하지 않았다. 이에 부여는 시키가 원하는 물품을 제공하는 선에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부여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초기엔 부여도 바이칼로 갔다. 하지만 기원전 2500년경, 기후가 추워지면서 부여족 역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사달의 승인을 받고 북만주에 정착한 것이다.




북만주에 정착한 부여는 가지고 온 아느의 물건들을 보관하고자 항카호 인근에 영고탑을 세웠다. 그리고 닝구르를 5개 수도 중 하나로 정하고 이를 보존하였다.





아느의 유적을 담고 있는 우리의 성지는 바이칼의 신시, 항카호의 닝구르, 만주 홍산문명의 아사달, 랴오닝 반도 남쪽 바닷속의 왕검성과 나머지 한 곳이 있다. 이렇게 다섯 군데 성지가 우리 민족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아사달과 왕검성은 작동을 멈추었고, 신시와 닝구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홍산문명이 파헤쳐 지고 있는 중 어떤 상황인지 살필 수 있어야 하며, 왕검성이 발굴될 경우 회화족의 쓸데 없는 주장을 잘 막아내야 할 것이다. 조만간 신시와 닝구르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린은 린과 릴을 중심으로 한린의 지도하 집단이 운영되었고, 배달은 정치는 한웅을 중심으로, 제천행사는 사흐를 중심으로 제정분리가 되었는데 반해 고조선은 다시 단군에 의해 제정일치가 이뤄졌었다. 이에 반해 부여는 린과 왕을 중심으로 분권정치가 이루어 졌다.




부여는 린만 아느계였다. 그래서 린 아래 만민평등 이었다. 백성들이 모두 동격이었다. 왕이건 사제건 귀족이건 평등했다. 그래서 왕권이 강할 수 없었다. 이에 부여는 모든 것이 5개로 나뉘어 역할 분담을 했다. 일 제대로 못하면 갈아 엎는 건 당연한 현상 이었다.



 

부여는 중앙에 제사를 주관하는 린과 왕이 있었다. 아느에서 여사제를 보필하던 린은 초월자와의 소통은 불가능 했으나 혼백을 다룰 수 있는 존재로서 부여 전체 지역을 손바닥 보듯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에 부여는 린을 중심으로 만민 평등 념이 정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린이 죽으면 린의 혼백은 부여의 왕의 초자아를 지나 혼돈의 벽을 너머 근원자아의 생명의 나무에 안착했다. 린의 혼백을 자신의 근원자아에 담은 부여의 왕은 항상 근원자아가 열린 상태가 되었다. 이에 부여의 왕이 린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린이 부여의 왕을 떠날 때가 찾아온다. 린의 혼은 하늘로 가 버리고 백은 부서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 부여의 왕은 린의 혼이 떠나갔음을 숨기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짓을 했기에 린께서 가버리셨는지 질타를 받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그 스스로가 가진 왕권을 놓기 싫어한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 부여의 왕은 그 질책을 몸소 견뎌야 했다.




하지만 영토에 욕심이 없었던 린으로 인해 부여로 인한 영토전쟁은 적었다. 이에 역사에 크게 남긴 자취가 없다. 하지만 마한이 무너지고 고조선이 무너진 이후에도 부여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백제와 고구려는 누가 부여의 계승자인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다. 삼한을 잇는 정통성 개념 때문이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모태이기도 했으며 고구려가 가장 강성할 시점에도 국가를 유지했다.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흰색 옷이 부여의 것이다. 윷놀이, 온돌 역시 부여의 것이다. 윷놀이는 5개 집단으로 구성되었던 부여의 정치체계를 나타낸 것으로 중앙부여, 동,서,남,북 부여의 정치 체계를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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