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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31. 2022

하란의 영지주의, 한의 무속 그리고 의지하는 자들

한민족의 현재

예전 기독교에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권력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공격받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하지만 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기독교인들에 비해 좀 더 인간의 진화 방향에 어울린다.



영적인 것에 계속 관심을 갖고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영지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무지했고 이에 영지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처음 영지주의자가 나타났을 때 한동안은 영지주의가 우세했었다.



가운데는 엘이고 원은 서클이다. 서클은 따른다는 뜻이다.

엘이 가진 지식을 따른다는 의미로서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문양이다.



영지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논쟁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이 가진 지식을 발전시키는게 영지주의의 숙명이다. 엘은 당연히 이를 어여쁘게 보았다.



그들의 논쟁에 오류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계속된 토론으로 오류를 잡아가고 자신이 어떻게 진화할지 결정하고 이를 자식과 후대에 알리는 것, 이것이 영지주의다.




위키피디아 등에서 영지주의를 검색해 보면 그 중심이 시리아, 페르시아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곳이 하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에도 시키들의 유입을 피할 수 없다.


시키 계통에서의 핵심은 원죄와 회계이고, 아느 계통에서는 환희와 깨달음을 중심에 두고 있다.



문제는 시키 계통에서는 시키의 본질이 안 사라진다는데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영지주의의 세계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다시 시키들이 발원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본능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다시 원시적본능이 되살아 나고 있다.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문양은 크게 2가지 이다.





하나는 위 문양과 같이 엘을 따르겠다는 초자아적 성향이다.






다른 하나는 원시적 본능에 기반한 자들이다.

이들은 원시적본능을 통해 힘을 얻었다.

왼쪽 그림을 보면 칼을 들고 있다. 무한한 힘을 의미한다.

그 힘을 통해 권능을 얻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그림에서 풍뎅이라던가 새라던가 많은 동물들이 숭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셋 셋 셋

각각 이를 따르는 인간들을 의미한다.

숫자 3은 하늘에 가보지 못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문양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별과 달, 그리고 태양이 보인다.


달을 명상하는 자, 별을 명상하는 자 그리고 태양을 명상하는 자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태양 밑에 뱀의 형상이 있다.

이게 바로 원시적 본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악한 악마, 사탄을 표현할 때 나오는 사악한 뱀이란 것은 원시적 본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은 초자아를 중심으로 엘을 따르는 자들과

원시적 본능을 따르는 자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 둘은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버리고 말았다.





뱀의 머리에 있는 태양의 형상을 다시 살핀다.

태양 주변으로 뻗어 나오는 빗살은 모두 16개이다.

뱀 몸통 뒤에 하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서 2는 100을 뜻한다. 완성됨을 말한다.

8은 여기서도 운명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에서 8+8=16, 16은 영원한 권력, 영생, 문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16개의 꽃잎을 갖는 불교는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게 사탄이다.





그러나 절대적 어둠은 사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가진 본능의 영역도 절대적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 어둠을 사탄으로 착각하는 것 뿐이다.


절대적 어둠에는 선악 개념이 없다.

빛 역시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다.

빛은 좋은 일만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스런 라(La)가 빛의 형태이기에 태양빛을 절대 선으로 보는 것처럼,

어둠의 권능이 어둠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어둠을 절대적인 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악]이란 존재 자체가 될 수 없고, 또 존재하지도 않는다.



악이라는 것은 백에 기반하고 있다.

백 중에서도 나쁜 백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일시적인 존재 일 수 밖에 없다.


물이 필요하다고 물만 먹으면 죽는다.

소금 역시 필요하다고 바닷물을 먹으면 이내 죽고 만다.


어떤 것도 과하면 안 된다.


그런데 독물을 경험했다고 물은 다 독이다 라 한다면 성급한 일반화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조심해야 할 바다.






서쪽으로 이동한 하란에 대해 살짝 짚어본다.



과거엔 터키, 이라크, 레바논 등 이 일대가 모두 시리아 영향권 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하란이다.



과거 시리아를 중심으로 무역을 통해 영지주의가 퍼져나갔다.

지금은 수피-마니교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기독교가 번성하기 전까지는 마니교가 우세였다.







마니교의 그림에는 나무가 있다.

근원적 자아에 있는 생명의 나무를 나타낸 것이다.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 하나하나가 과거 나의 전생에 해당한다.



부여에서 린의 혼백이 왕의 근원자아의 생명의 나무에 잠시 자리 잡는다고 했다.

유사하다.



부여에서는 린의 혼과 백이 왕의 생명의 나무에 들어가는 것과 달리

지금 무당은 떠돌아 다니는 백만 받아들이고 있다.



원시적 본능에 기반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좋지 않은 모습에

빠져있는 것 이다.

큰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사/무당에 의지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다.

절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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