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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Feb 02. 2022

BC 1300, 닝구르고조선의 수습

한민족의 혼란기, 아사달 이후

Bc 1300, 닝구르고조선의 수습



기원전 1300년경 무렵, 1천년 간의 안정기를 영위하던 삼한 체제는 단군의 죽음으로 급랑을 맞게 된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단군이 세 명의 아들 삼랑을 데리고 마한으로 출장을 왔다가 피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상황 1.   그런데 단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군사 체제가 아니었던 고조선과 달리 부여는 상비군 체제 였기 때문에 단군이 없는 고조선의 장악은 순식간이었다. 이는 북부여의 짓으로 결국 삼랑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부여가 고조선을 함락했다고 보기엔 개마무사의 대처에 있어 이상한 점이 많다. 비록 개마무사가 삼한 내부의 다툼에 대해선 불개입을 천명하곤 했으나 부여의 고조선 함락에 있어 개마무사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BC 1000년 경 갑자기 고조선 전반적으로 비파형동검이 전파된 게 그 이유다. 이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상황 2.   아사달과 왕검성의 폭발은 삼한을 너머 아시아 전체에 충격을 가져왔다. 제천행사를 통해 아시아 전체를 다스리던 천자국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삼한 전체의 위기이기도 했다. 당시 상비군을 운영하던 부여에서 급하게 군사를 파견해야 했다. 먼저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했는지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아사달은 이미 폐허였고 왕검성 일대는 바다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아사달에는 삼한 뿐만 아니라 산둥, 만주 일대를 대표하는 마그와 사흐 뿐만 아니라 차기 단군으로 언급되던 후보들 모두 모여 있었던 터라 피해는 막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술과 재물을 모두 가지고 있던 왕검성의 침강은 물리적인 유물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사람과 유물을 잃어버린 고조선은 기원전 1300 경 천자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천자국이 사라진 아시아는 난리였다. 모두가 천자임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군사를 보낸 부여는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크게 4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 부여가 고조선을 승계했다. 그리고 닝구르를 고조선의 중심으로 삼았다.     



둘째, 왕험성을 왕검성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이곳은 닝구르고조선의 번조선으로 삼았다.     



셋째, 만주에 방어를 위한 평양성을 세우고 군사를 주둔 시켰다.      



넷째, 아사달의 시장 기능을 두 군데로 나눴다. 회화족을 위해 베이징 지구 내 조양과 유목민족을 위해 랴오닝성에 있는 조양(차오양)으로 구분 한 것이다. 천자국이 없어진 상황 두 세력의 화합은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여로 이동한)고조선의 뜻과 상관없이 동아시아는 격변했다.     



첫째, 모두가 천자라고 자처했다. 많은 나라가 생겼다.     



둘째, 회화족 역시 마찬가지다. 회화족들의 나라가 일어났고 결국 3~600년이 지난 기원전 700년대 상나라를 무너뜨리며 중원을 확보했다.               





한편 강화도에 있던 삼랑은 강화도에 마니산성, 황해도에 구월성을 만들며 회복을 꾀했으나 결국 한반도에서 죽고 말았다. 이미 이들은 차기 단군의 지위에서 빗겨나 있었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죽어서 별이 되었다고 삼태성이라 불리었고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을 칭하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의 삼랑은 이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여는 제천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온전한 천족이 아니었기에 360가지 12,000가지 제천행사 중 삼분의 일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마저 부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결국 고조선은 정치와 제례가 분리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고조선의 전반기 1천년 간은 정치와 제례가 합쳐 있음으로 동북아시아 일대의 천국으로 숭배를 받았었다.          




원래 신장과 군장 일치사회가 고조선의 특징이였다. 제사도 지내고 무역과 산업도 발전시키고 군사도 갖고 있는 게 고조선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천행사를 하지 못하기에 영향권을 직접 관리 하지 못하는 부여에 의한 고조선은 무기가 필요했다. 이에 발해만의 서쪽에 해당하는 요동에서 아사달, 랴오닝반도, 만주, 한반도에 이르는 영향권을 무력에 의한 다스림을 취해야 했다. 개마무사가 활용되었고, 그 영향권에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조선은 초기가 훨씬 강했다. 제천행사를 통해 신의 뜻을 전했고, 사흐나 마그를 상당히 데리고 왔고 또 육성을 시켰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고 무역과 상업을 발전시켰고 농업도 발전시켰다.     



마그가 많았기에 고조선은 농사도 잘 지었다. 고조선 때는 만주가 옥토였다. 근데 고구려는 만주를 밭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냥 초지였다. 고조선 때는 기후를 제어할 능력도 있었고 기후가 좋지 못해도 충분히 농사지을 수 있는 농업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후대에 가서는 날씨 제어도 못하는 건 당연하고 농업기술 조차 퇴보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조선은 하늘의 뜻을 살피고 돈도 많고 식량도 많고 사람도 많고 따르는 이도 많고 과학자도 많고 현자도 많은 사회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거대한 건축물도 있었다. 되게 풍요한 사회였다.          



이처럼 풍요로운 고조선을 부여가 장악하게 되면서 부여는 5개로 분열되었던 사회 구조가 좀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북부여, 서부여, 동부여, 남부여로 나뉜 군사조직과 여사제를 모시고 제천행사와 비단 짜는 일을 하는 중앙부여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주로 상업과 직조, 누에치기와 유목이 중심으로 농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부여를 뒤이은 고구려의 농사기술이 고조선에 비해 뒤떨어진 것은 당연하다.               





당시 항카호 인근이 중앙부여였다. 북부여는 나머지 부여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세했다. 기원전 1300년 이전만 해도 부여를 제외한 유목민은 다 합쳐야 10만명 이내였다. 하지만 천년이 지나 기원전 300년대가 되면서 유목민의 숫자는 천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유목민의 힘이 강해지면서 북부여와의 잦은 전투가 이어졌고, 무엇보다 북만주가 추워졌다. 사람살기 좋지 않은 땅이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북부여의 힘이 약해지고 말았다.     


한편 이런 상태에서 기후변동이 발생했다. 시기는 기원전 1000년 경으로 인류 리셋 사건으로 인해 유라시아 전체적으로 도시가 폭파되고 숲이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은 빙하기가 발생한 것이었다. 극심한 추위가 다시금 이어졌다. 농사가 힘들어진 것이다.               



당시 왕검성의 불 밝히는 것은 석유였다. 노천석유 였던 것이다. 여수석유단지가 세계적 규모인 것 당연하다. 아느 살 때도 아스팔트와 유청으로 코팅했던 민족이고, 왕검성에서도  땅 파고 가스 모아서 관으로 이동시켜서 불을 켰었다. 우리에게 석유는 아주 친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검성 폭파 되었을 때, 동아시아 하늘이 몇 달이나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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