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롱 엄마
새벽에 일어나 김치를 볶는다. 잘게 다진 양파와 베이컨도 더한다. 달달 볶다가, 마지막에 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막둥이의 최애 반찬 완성이다. 참 별것 아닌데, 갓 지어진 밥에 볶음김치를 올려 줄 때마다, 아이는 엄지척을 내민다. 바라만 봐도 좋은, 환한 웃음을 내게 선물한다. 수능 날 도시락 반찬은 뭐 해줄까? 너 좋아하는 불고기? 장조림? 내 질문에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김치 볶음! 거기에 치즈 한 장이면 충분해.
보온 도시락통을 준비한다. 달랑 볶음김치만 보낼 수는 없어서, 어제 미리 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뭇국을 끓여 놓았다. 메추리알을 삶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서 장조림도 만들었다. 밥이랑 국을 통에 살살 눌러 담는다. 한 김 식기를 기다렸다가 뚜껑을 닫는다. 혹여나 뚜껑이 안 열려서 힘을 주다가 국물을 엎지르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니까. 수저도 챙겨 넣는다. 수능 날 도시락을 들려 보내놓고 나니 막상 수저를 빼먹었더라는 에피소드는 엄마들 사이에 유명하니까. 식후에 먹으라고 상큼한 귤도 두 개, 달콤한 초콜릿과 비타민도 넣는다. 그리고 또, 빼먹은 건 없나? 참, 치즈도 넣어야지.
벌써 두 시. 이미 아이는 도시락을 먹고, 영어 시험을 치르고 있으려나? 밀려드는 식곤증에 지지 않고, 잘 집중하고 있으려나? 아침에 아이를 내려주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시험이 중반을 넘어선 시간이다. 수능 한파는커녕 11월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날씨에,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살핀다. 잔뜩 비를 품은 흐린 가을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들이 골목골목을 밝히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이 길어서, 좋으면서도 걱정스럽다. 이상기후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무용한 생각들에 잠겨 있다가, 노트북을 챙겨서 집 밖으로 나온다. 책방으로 차를 달린다. 가을이 언제 이토록 깊어졌을까. 깊은 산속 홀로 책방에 앉아 있는 듯, 책을 읽는다. 창밖으로 가을이 쏟아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이 시간과 이 공간 속에, 고요한 자유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시계로 시선이 향한다. 이미 시험 막바지에 이르렀을 아이에게로, 생각이 자꾸 달려간다.
어땠어? 잘 본 것 같아? 저녁에 다시 만난 아이에게 묻는다. 엄마, 어떡해? 나 답을 밀려 쓴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이에게 차마 더 묻지는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부글부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다. 그동안 애썼어. 아이와의 관계는 늘 줄타기하는 기분. 너무 멀어지지도, 너무 가까워지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중요한데, 매번 쉽지 않다. 본인이 더 긴장되고 당황했겠지, 들끓는 마음을 다독이고 돌아보니, 아이가 한없이 작아 보인다.
어제 고생 많으셨죠? 다음 날 다정한 이의 인사를 받는다. 제가요? 시험 보는 당사자가 힘들지, 제가 뭘요. 민망한 웃음으로 답한다. 그래도, 엄마도 힘들죠. 종일 걱정하셨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문득, 아주 오래전 내가 수능 시험 보던 날, 절에 가서 백팔배를 했다던, 내 엄마가 떠오른다. 나도 좀 그랬어야 하는 걸까? 하하, 전 그냥 오랜만에 좀 쉬었어요. 아무래도 난 ‘나이롱 엄마’인가 보다. 어쩌면 그 편이, 아이와 나 모두에게 좋을지도.